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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새벽예배 2022.08.29 | 창세기 16장 1-16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16장 1-16절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새벽 묵상


언젠가 연합기독뉴스에 “용기-실패라고 부르지 말라, 교육이라고 불러라”라는 제목으로 윤석호 목사님께서 이런 글을 올리셨습니다.


실패란 화살로 어떤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것이 아니라 화살을 쏘지도 않은 것이다. 실패는 목표를 세워놓고 실행하다 성취하지 못한 것이 실패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아예 목표를 세우지도 않고 목표를 세웠다 해도 실행해보지 않은 것이다.


이제 실패에 대한 두 번째 정의를 내려 보고자 한다. 실패는 끝난 것이 아니라 성공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교육과도 같은 것이다.


에디슨은 이런 말을 했다. “결코 실패라고 부르지 마라. 교육이라고 불러라.” 그렇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패를 많이 해봐야 성공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서는 보통 2천 번 이상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걷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넘어짐을 통해서 그리고 실패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단번에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한 번에 성공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고 장영희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다 실패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실패하면 포기하기 쉽고 실패의 이유도 잘 알지 못해 그냥 팔자이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믿음의 사람은 다릅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고 오히려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더 강해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새벽에는 생명의 삶 책에 나온 해석과 좀 많이 다르게 본문을 통해 이 “실패”를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래, 아브람, 그리고 사래의 몸종인 하갈입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아들을 주신다고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는 계속 아들이 없는 상태로 가나안에 들어온 지 또 다시 10년이 지나자 75세가 된 사래는 이제 마음이 초조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하갈이 아브람으로 인해 잉태하자 이건 뭔가요? 4절 끝에 보시면 하갈이 그의 여주인 사래를 멸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래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사래는 결국 6절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기미가 안보이자 눈물을 머금고 종을 아브람에게 들여보내어 비록 내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아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다니...사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결국 하갈과 부딪치고 하갈은 도망하고...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건에 개입하셔서 9절 하갈에게 나타나 다시 주인 사래에게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10절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번성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접고 다시 돌아가 16절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사래, 아브람, 하갈 이 세 사람의 행동가운데 실패의 모습을 묵상하며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실패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꼭 발견하고 돌아가는 이 새벽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첫째로 사래는 인내하지 못하니까 실패했습니다. 물론 65세에 아들 준다는 약속을 받고 10년이나 기다렸으면 많이 기다린 것 맞습니다. 아마 10년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세 천사를 만난 것 아들 주신다고 한 것, 내가 분명히 헛것을 본거다!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말이 10년이지 1,2년이면 몰라도 10년이나 되었어도 아무 소식이 없는 자신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래는 결국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고 맙니다. 아! 아마도 내 몸종을 통해 아들을 주신다는 뜻인 가보다! 축첩이라고 하죠? 몸종 하갈의 몸을 빌려 아들을 얻고자 시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킵니다. 합리화시킵니다. 인간적인 잔머리를 씁니다. 결국 이로 인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 나중에 낳게 될 사래의 친 아들 이삭과의 갈등, 저 팔레스틴의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중동전쟁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래의 참지 못함..이게 수천 년이 넘도록 인류 최대의 끊이지 않는 민족의 비극을 가져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셨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로 오래 참기를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결국 25년을 기다려 아들을 얻게 된 사래. 모든 인간의 생각이 완전히 포기된 그 순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제는 완전 불가능하다 생각될 때 일하셔서 우리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시는 하나님, 노아는 120년을 기다리면서 방주를 만들고 큰 비를 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이 참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 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일주일이면 갈 거리를 자그마치 40년이나 광야에서 훈련시키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 때로는 너무 응답이 늦는다고 해도 어거스틴의 고백대로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아닙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잘 아시죠? 그런데 시작이 뭡니까? 오래 참는 것, 인내하는 것 그게 최고의 은사 사랑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신기한 것이 있는데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시작했는데 제일 끝에 고린도전서 13장의 7절에도 역시 사랑이란 참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시작도 참는 것이고 끝도 참고 견디는 것 그게 최고의 은사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뭘 주는 것도 중요하고, 서로 사랑하면 스킨쉽도 중요하고,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도 중요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핵심은 바로 모든 것을 참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wife 사모님께 어떤 기자가 물어보았답니다. 사모님 남편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랑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이혼하고 싶으신 적 한 번도 없으셨습니까? 그랬더니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죽이고 싶은 생각은 수도 없이 있었습니다. 그랬다고 하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첫 번째 방법, 바로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릴 위해 참으셨습니다. 배신하고 도망가고 탕자처럼 제 멋대로 사는 우리들 그냥 포기하셔도 되는데 참고 또 참으시고 참다 참다 도무지 참을 수 없어 독생자 보내사 대신 죽게 하시므로 참으심의 극단을 보여주신 하나님, 지금도 세상을 끝내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고 계시는 분, 한 영혼이라도 더 깨닫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인내로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두 번째로 아브람의 실패는 흔들림에 있었습니다. 비록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아내 사래라 할지라도 모든 책임의 원인은 사실 아브람에게 있었습니다. 장막의 주인으로서 아무리 사래가 잔머리를 쓰려고 해도 단호히 거절하고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히 붙잡아야 했습니다. 앞에 창세기 15장 4-5절에 하늘의 뭇별까지 보여주시면서 분명히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 15장 17절에는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언약을 보증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보다도 흔들리지 말고 굳건히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기다렸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 사래가 너무 무서운 성격이었는지 아브람이 소심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너무도 쉽게 한 번도 거절 안하고 하갈을 취하라는 사래의 말에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아무 설득도 없이 그대로 끌려갑니다. 마치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듣고 쉽게 선악과를 먹었듯이 아무 줏대도 없이, 그냥 사래가 하래는 대로 넙죽 하갈을 취합니다. 나중에 사래가 하갈이 자신을 멸시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역시 줏대가 없습니다. 6절 보십쇼. 정말 우유부단하고 아무 책임감이 없습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남자로서 집안에 가장으로서 전혀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주관이 없이 여기 저기 끌려 다닙니다.


삼손의 문제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며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삼손, 들릴라의 눈물과 애원에 속아 힘의 근원 머리카락의 비밀을 결국 말해 버립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이 있고 안할 말이 있는데 흔들리니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결국 눈 뽑히고 연자 맷돌 돌리는 불쌍한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로마서 13장 12절 이후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했습니다. 단정히 행하는 고 흔들리지 말라는 바울의 힘 있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 예수님은 모래위에 집을 짓지 말고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즉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들은 다 양보해도 복음에는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됐으면 좋겠습니다.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위에 굳게 서리.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견고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하갈의 실패는 자기 본분과 위치를 망각한 데 있었습니다. 이 하갈은 창세기 12장 16절에 보면 아브람 일행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왕에게서 얻은 여종이었습니다. 분명 여주인 사래의 총애를 받았기에 이렇게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주는 여인으로 추천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잉태하니까 자기 위치를 망각합니다. 아들을 잉태하니까 변질되어 4절 보십쇼. 끝에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히브리어로 “와테갈”하찮게 보다. 즉 주인이 사래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주인을 우습게 여기게 됩니다. 사람이 어떤 좋은 것을 소유한다거나 명예를 얻게 되면 첫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 이게 모든 인간이 조심해야 될 유혹입니다. 내가 자격이 안 되는데 이건 전적인 주인의 은혜입니다. 이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연약한 인간이라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울왕이 그랬죠. 첫 모습 겸손하여 행구 사이에 숨는 그 모습, 그 모습은 온데 간 데 없고 어느 샌가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다윗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한다고 지나치게 생각하여 수년 동안 다윗 추격하다가 시간낭비 힘 낭비하고 마지막 길보아산 전투에서 스스로 칼에 엎드러져 부끄러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내 위치를 늘 기억하는 일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원래 죄로 인해 가능성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 구원받게 되었고 영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내가 원래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자신의 위치를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의 감격이 시들시들해지고 열정이 식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갈의 실패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새벽에 기도하실 때에 용서받은 죄인의 감격이 다시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인내하시는 분, 오래 참으시는 분 십자가를 끝까지 참으신 분이셨습니다. 흔들림이 없으신 분이였습니다. 이 땅에 우리 죄를 위해 오신 어린양의 위치를 잊지 않으신 자리를 지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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