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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한 깨달음

새벽예배 2022.11.02 | 창세기 42정 18-25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42정 18-25절


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새벽 묵상


엊그제는 할로윈데이라서 그런지 밤이 되니까 역시 시끌벅적하고 떠들썩했습니다. 창문을 열고 잠깐 바깥을 구경하니 웃고 즐기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귀신의 날에도 뭔지도 모르고 저렇게 좋아하고 기뻐하는데 우리 기독교의 절기 때에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 죽음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용서받게 되었고 이 땅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 영생이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거기서 오는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저렇게 기뻐하고 웃음과 춤추면서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 이 놀라운 깨달음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다시 뜨거워지시고 항상 기뻐하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여 토하여 내치리라 하는 책망 듣는 자 되지 마시고 항상 기뻐하며 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새벽에는 깨달음에 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깨달음을 “보리”라고 합니다. “각”이라고도 하는데 불교도 깨달음을 아주 중요시 합니다. 참선을 하게 되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하죠. 이 땅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는 것 이게 불교의 중심입니다. 철학의 중심도 사실 깨달음입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마침내 얻게 되는 것 그게 깨달음이요,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 믿는 사람들의 깨달음은 불교나 철학과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깨달음은 인간이 뭘 노력해서 얻는 깨달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깨달을 것은 두 가지 인데,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들 보내주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과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 여전히 죄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순간순간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가 들어오는 것을 아주 예민하게 깨닫는 것 이게 두 번째 깨달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옷 입고 있으면 아주 분명하고 예민하게 죄의 유혹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죄가 오는 것을 알고 탄식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시고 성격이 예민한 게 아니라 죄가 들어올 때에 예민한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요새 속회 잘 드리고 계십니까? 소그룹 모임 잘 하고 계십니까? 우리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 목사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모임은 속회였습니다. 속회로 모일 때마다 웨슬리 목사님은 반드시 속장 인도자로 하여금 속도원들에게 제일 처음 묻게 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이게 첫 번째 질문이었고, 그럼 그 죄와 싸워 어떻게 이겼습니까? 이게 두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속회 모임 하실 때 처음 나누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혹시 죄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먹는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 속회 후에 월남쌈 먹을 꺼니까 빨리 예배 후딱 드리고 맛있게 먹자. 이런 속회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없는데 제가 살았던 조지아 주에는 그런 속회가 있더라고요. 제가 그 속회 이름을 믿음속이 아니라 월남쌈속이라고 바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과 다른 뭔가 영적인 예민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돌아오는 모임부터 분위기를 바꿔가시길 바랍니다. 가장 먼저 무슨 죄의 유혹이 있었는지 어떻게 싸웠는지 나누는 참 속회의 정신을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본문에는 지금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줄도 모르고 요셉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정탐꾼으로 몰리고 갇히게 된 상황에서 요셉은 18절 사흘 만에 형들에게 제안합니다. 19절 너희가 확실히 정탐꾼이 아니라면 한 사람만 남아 옥에 갇히고 나머지 아홉은 곡식을 가지고 가서 집안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20절 너희들이 말한 막내아우를 데리고 오라 그러면 의심받지 않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이런 제안을 들을 때 요셉의 10명의 형들은 누굴 떠올렸을까요? 예 아버지 야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야곱이 분명히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베냐민을 데려가지 못하게 하실 텐데 하면서 21절 보십쇼. 이제야 후회를 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바로 여기서 이제야 조금 회개하는 이 요셉의 형들에게서 우리는 첫 번째 죄에 대한 깨달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즉

1. 첫째로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함”이 죄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그냥 나만 착하게 살면 되지,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그만이지 하고 내가 무슨 죄가 있나 생각하기 쉬운데 다른 이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함, 즉 나 몰라라 함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쇼. 오른편 양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 뭐였습니까?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말씀에 의인들이 우리가 어느 때에 그랬습니까? 물으니까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여러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들이 얼마나 있으십니까? 혹시 그저 나만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까?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 책망하신 것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여기 형제 중에, 즉 이웃에게 하지 아니한 것, 즉 그들의 괴로움을 보고 듣지 않은 무관심함이 바로 영원한 불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기억해 보십쇼. 당연히 괴로움을 당한 자 강도만난 자를 도와야 하는 제사장, 레위인이 그냥 지나쳐 가버린 것 그게 죄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정확하게 꼬집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만 따르겠다고 하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괴로운 이웃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껍데기 그리스도인,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사사기의 주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평안함을 주시면 너무 나태해지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백성들,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울부짖어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조금 있으면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떠나고 다시 하나님이 벌하시면 금방 또 괴로워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또 사사를 보내셔서 해결하시고 바로 이 괴로운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성경이 바로 사사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괴로움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쉽게 외면하고 그러는지.. 남의 일은 남의 일, 다른 사람 보실 것 없습니다. 바로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부터 바뀌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괴로움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바르게 말하는 자의 말을 듣지 아니함도 죄의 출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22절 보십쇼. 맏형 르우벤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르우벤은 앞에 창세기 37장에 모든 형들이 요셉을 잡아 죽이려 할 때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생명을 해치지 말자.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후에 요셉이 없어짐을 보고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하면서 괴로워했던 르우벤, 여러분 이 르우벤이 나중에 또 다른 어머니인 빌하와 통간하여 범죄한 것을 보니 아마도 르우벤은 말만 이렇게 요셉을 해치지 말자 했던 사람 같기도 하고 맏형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도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르우벤의 말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문제는 동생들이 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왜 갈라졌습니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젊은 신하들의 말만 듣고 나이든 신하들의 옳은 조언을 듣지 않고 여로보암과 온 이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더 잔혹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옛날 사람이고 꼰대라고 해도 바른 이야기를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르신들은 어떻게 하면 잘못 가는 것인지 몸으로 익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내게 바른 말을 할 때에 화내지 말고 잘 들음으로서 죄를 이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꼭 연세 있는 분들 뿐만이 아니라 아주 젊은 사람을 통해서도 올바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잘 분별하시고 옳은 길, 바른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에 대한 출발이 된다는 깨달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내일 본문이지만 27절과 28절 보십시오. 요셉의 형들이 시므온만 인질로 감옥에 잡히게 두고 이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사람이 여관에서 자루를 푸니까 돈 내고 곡식을 샀는데 돈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여러분 이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자리에서 다 열어보고 즉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돌아가지는 않고 28절 중간에 보십쇼. 웃기는 문장 말하고 돈이 좋아서 그냥 넘어갑니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이게 다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요셉에게 돌려줄 생각은 안 하고 그냥 어쩌다 실수로 들어온 거지 그냥 덮자 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냥 가나안까지 가고 맙니다. 가나안에 가서 모든 이들의 자루를 풀어보고 돈이 다 그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게 됩니다. 학자들은 요셉이 호의로 그냥 돈을 돌려준 것이다, 돈 받지 않고 곡식을 주었다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얻을 교훈은 인간이 얼마나 돈에 약한가 하는 것입니다. 딤전 6장 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셨습니다. 돈은 사랑하지 말고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돈을 사랑함으로 죄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잘 사용하셔서 청부, 깨끗한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리 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구원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시면서 죄에 대해 예민하게 깨달으시고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잘 싸워 승리하는 최후 승리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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