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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습니다

새벽예배 2022.12.07| 시편 40편 11-17절 | 이선기 목사




시편 40편 11-17절


11.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12.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13.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4.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15.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16.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새벽 묵상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머리털과 관련된 유명한 성경구절이 두 군데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어디죠? 예, 첫 번째는 마태복음 10장 30절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하나하나 다 세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세밀한 부분까지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시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로 바로 오늘 본문에 머리털과 관련된 유명한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12절 후반에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찬송가 289장이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라는 제목의 찬송인데 그 2절 둘째 줄에 보시면 바로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다윗은 이 시편 40편을 지으면서 죄가 많아도 너무 많은 머리털보다도 더 많은 자신의 추함을 발견하면서 너무 실망스럽고 통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런 표현은 다윗뿐만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꼭 해야 할 고백 아닙니까?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이이야말로 모든 믿음의 첫 번째 과정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는 첫 관문, 이 죄인 됨을 깨닫고 고백하는 신앙의 출발선의 감격을 늘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그저 교회 오랫동안 수십 년간 다니고 헌금만 꼬박꼬박하면 원하는 복들 다 받게 되는 그런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를 30-40년을 다녔어도, 신앙의 첫 단계, 즉 자신이 철저히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죄성의 고백이 없으면 죄송하지만 아직 신앙은 아직 그저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겨우 턱걸이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까 못 들어갈까 걱정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들의 공통적인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인이 많은 교회, Sunday 한 시간 크리스천이 많은 교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강단이 죄를 잘 다루지 않는 설교 강단이 되었습니다. 철저한 회개 촉구가 사라지고, 그저 내세의 복, 이 땅에서 부자로 잘 먹고 잘 살도록 빌어주는 마음을 찢는 회개가 사라진 강단, 물질적인 복만을 자랑하는 퇴색된 설교, 참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여기 다른 교회 다니시는 분도 새벽에 꽤 오시는데 여러분의 교회는 어떠십니까? 정말 설교 강단에서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계십니까?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성이 그 죄의 뿌리가 우리 속에 남아 있다는 것,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시고 오직 나에게 실망하고 오직 나의 죄를 통회하는 신앙의 기본과정을 잘 다지시고 건강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시편 40편은 어제 들으셨겠지만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의 위기를 극복하고 난 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내 피를 받은 내 자식이 나를 죽이려고 했던 다윗의 고통, 다윗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환란 중에 환란을 다 겪고 난 후에 고백합니다. “내가 왕이면 무엇하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자식으로 인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존의 위협을 겪게 되다니” 다윗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한탄하면서 이게 다 자신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만 다윗은 이 낮아짐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낮아짐으로 훈련시키셨을 뿐만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게 하시며 최고의 낮아짐을 직접 보여주셨다는 사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고난을 통해, 낮아짐을 통해 주시는 교훈과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첫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내 과거의 죄들을 돌아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에 어떻게 보면 가장 파렴치한 죄를 지었던 왕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도 좀처럼 짓기 어려운 죄, 즉 남의 아내를 범해 버리고, 임신까지 되어 그 죄를 감추려고 술수를 쓰다가 안 되니까 더 큰 죄, 전쟁터에서 그 남편을 일부러 죽게 만드는 살인죄까지 저지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간음죄와 살인죄로 인하여 나단 선지자의 지적과 함께 시편 51편을 지으면서 눈물로 침상을 적시는 철저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사실 다윗은 맏아들 암논이 배다른 아들 압살롬의 친 누이동생 다말을 겁탈할 때에도 철저하게 아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시키지 못했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친 누이동생의 원수를 갚는다고 첫째 아들 암논을 죽이게 됩니다. 여기서도 다윗이 압살롬을 불러 회개하게 하였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압살롬을 다시 돌아오게 한 후에도 사후처리가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신앙인이라도 왜 자식 앞에서는 그렇게 유약해 지는지...다윗은 아마도 이제야 지금 아들 압살롬으로 인하여 어마어마한 일을 다 겪고 난 후에야, 지난날에 지은 모든 죄들을 돌아보며 얼마나 자신이 부족한 아버지이고 죄인인지 철저히 회개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 믿는 사람들이 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교회 가서 찔찔 짜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하시는데, 교회에서 찔찔 짜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내 대신 십자가 지시고 대신 죽으신 주님의 은혜, 왜 날 사랑하시는지, 이 강도 같은 자신의 죄악된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왕자 스펄전 목사님은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 두 번째로 고난을 통해서 기도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 보십쇼. 다 무슨 구절입니까? 기도의 본질인 구원을 소망하는 구절입니다. 13절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4절 “내 적들이 망하게 하시고” 15절 “나를 놀리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16절 “주를 찾는 자는 즐겁고 기뻐하게 하시고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모든 구절이 다 구원에 대한 소망의 구절입니다. 이게 기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식 때문에 고생고생 했는데 앞으로는 재산이 많아지게 하시고 자식들 속 안 썩이게 하시고, 사업 잘되게 하시고, 명예를 얻게 하시고 이런 내용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날 구원하소서, 원수들에게서 날 건지시고 보호하소서 라는 내용 뿐입니다.

여러분 권선징악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즉 선을 행하면 좋은 결과를 얻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 저와 여러분은 자신도 모르게 이 권선징악적 생각에 지배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욥기를 읽어도 꼭 어디만 읽습니까? 예 1장과 2장 그리고 맨 마지막 42장 갑절로 받았더라. 양과 소와 염소 다 갑절로 받았더라. 심지어 자식도 그대로 10명을 얻었더라.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고생한 만큼 눈에 보이는 보상을 두 배로 주옵소서. 갑절로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주시옵소서. 따불도 좋습니다. 이게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가 괜찮은 기도입니까?

오늘 본문의 다윗은 그런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16절 구원의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 기도하실 때에 과연 내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도의 본질인 구원은 빠져 있고,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없고 다 “주시옵소서”, “눈에 보이는 보상을 주시옵소서”, 제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마치 성탄절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달라는 어린아이처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가장 큰 영혼 구원, 가장 큰 선물,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는데 이것 가지고 안 됩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 말고 눈에 보이는 것을 주옵소서. 그런 것은 아닌지..아주 어릴 때 100원 기억하십니까? 아주 어린 4살짜리 아이스크림 먹고 있는 아이에게 삼촌이 아무개야! 한 입만 줘! 했더니, 돈 주면 주겠다고 합니다. 100원! 삼촌이 주머니를 뒤져 보니 100원은 없고 5000원 밖에 없어서 5000원을 주고 한 입만 달라합니다. 5000원을 받아든 아이가 잠시 5000원을 유심히 보더니 집어 던져 버리고 이거 싫어 100원!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들 아닙니까? 50개는 살 수 있는 것을 줘도 60만 배의 구원을 줘도 당장 내 눈에 익숙한 100원 달라는 우리들.

기도의 본질 구원에 대한 소망,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가 풍성한 참 기도의 사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나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17절을 보십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여기서 가난과 궁핍은 다윗이 정말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돈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지에 대한 솔직한 표현입니다.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즉 하나님은 바로 나를 생각해 주시는 분이시오, 나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나를 건져낼 분이십니다. 오직 나만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 구절에 오직이란 단어를 끼워 넣으면 그 의미가 더 살아날 것 같습니다. 마틴 루터도 “믿음”이 너무 귀하고 좋아서 로마서 1장 17절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오직 이란 단어를 끼워 넣었죠? 저도 이 구절에 오직이란 단어를 끼워 넣으면 그 의미가 잘 살아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나를 생각해 주시는 분이시오, 나에게 오직 도움이시오, 오직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오직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다윗은 고난 이후에 더 나만의 하나님, 하나님은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 분이신지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특별한 하나님이심을 다윗처럼 고백하시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고 바로 나를 위해서 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고백하고 선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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