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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재판

새벽예배 2023.08.22 | 사도행전 25장 13-27절 | 이선기 목사




사도행전 25장 13-27절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새벽 묵상

오늘도 역시 재판 받고 있는 바울 이야기의 연속인데, 여러분 이솝 우화 중에 토끼의 지혜로운 재판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어슬렁거리던 배고픈 호랑이가 깊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죠. 지나가던 나그네가 호랑이를 불쌍히 여기고 긴 나무를 구해 와 호랑이를 구해 줍니다. 구덩이에서 나온 호랑이는 은혜도 모르고 나그네를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나그네가 억울해서 다른 이에게 물어보자 했더니 소나 나무가 답을 하죠. 사람들은 나에게 일만 시킨다는 소나, 자신을 베어 가고 이용만 한다는 나무의 답은 나그네의 마음을 너무 답답하게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토끼가 답을 하는데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현장에 가서 직접 보자 하면서 호랑이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자 다시 구덩이에 들어가고 긴 나무는 원래의 자리로 치워지니까 토끼는 갑자기 재판을 멈춰버립니다. 토끼에게 속은 호랑이는 억울해서 구덩이에서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나그네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소나 나무를 찾아가서 말할 때 소나 나무가 너무 편파적으로 사람을 비난하던 그 순간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나그네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마 나그네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구나! 여러분 그 나물에 그 밥이 무슨 말입니까? 사전에 찾아보면 두 가지 뜻이 나옵니다. 우선은 서로 격이 어울리는 것끼리 짝이 되었을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 소나 나무나 호랑이랑 짝이 되어 사람을 싫어하는 모습, 딱 그 나물에 그 밥이죠. 또 하나는 서로 수준이 비슷하여 별 다르지 않거나 기대 이하임을 이르는 말을 일컫습니다. 그래도 기대했는데 웬걸 당시 상황과 사실에 객관적이지 못하고 너무나 편파적인 모습, 기대 이하의 모습에 아마도 나그네는 속으로 분명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차! 그 나물에 그 밥이구나. 내가 뭘 기대했는가? 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심정이 바로 이 나그네와 같았을 것입니다. 앞에서 벨릭스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죄 없이 2년이나 가두어 둔 벨릭스에게 혀를 내두른 바울, 총독이 바뀌어 베스도 총독은 어떤 사람인가 보자 기대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금이나마 기대를 했고 객관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저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줏대가 없는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사람. 사람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베스도는 이름의 뜻이 기쁨이었는데, 그저 사람의 비유를 맞추며 기뻐하는 그릇이 작은, 지도력이 없는 그런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베스도를 찾아온 손님 부부를 보게 되는데 13절 보십시오.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기 베스도에게 찾아온 이 아그립바왕은 로마 정부의 제가에 의해 갈릴리 지방과 베뢰아 지방을 포함한 팔레스틴 일부를 다스리던 왕으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당시 다스린 왕은 헤롯대왕 이었고요. 헤롯 대왕이 나은 아들이 헤롯 아그립바 1세, 벌레가 먹어 죽은 왕이었고 지금 이 아그립바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우선 이 부부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 아내가 누군지 에서 느껴지는데 여러분 이 헤롯 아그립바 2세와 동행한 “버니게”는 전임 총독 벨릭스의 아내인 드루실라와 자매간이고 아그립바왕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같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세 남매가 바로 드루실라, 아그립바 2세, 그리고 버니게 였습니다. 아직도 눈치 못 채셨습니까? 여기 아그립바왕과 버니게의 관계는 친 오빠 여동생이었는데 부부가 되었습니다. 근친상간, 자기 여동생을 아내 삼았다. 말이 됩니까? 버니게는 사실 이 근친 상간 말고도 여러번 개가를 했던 그 행실이 아주 방탕한 쾌락주의자였습니다. 이 근친상간한 오빠인지 남편인지와 한 몸이 된 이 부부의 더러운 행실은 유대 전역에 그리고 주변에 나라에까지 그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이런 그저 쾌락주의로 살아가는 이에게 바울의 재판을 상의한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그저 그나물에 그 밥이었다는 사실, 콩가루 집안에 콩가루를 더한 자들 3명이 머리를 맞대고 이 바울 재판 문제를 상의했으니 무슨 결론이 났겠습니까?

1.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로 불의한 자가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을 재판하는 웃기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깨달을 교훈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재판한다고 하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런 어리석은 모습을 얼마나 잘 아셨는지 이런 표현을 마태복음 7장 3절과 누가복음 6장 4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여러분 들보가 무엇이죠? 집을 지을 때 세우는 기둥을 말합니다. 대들보에서 대 자를 빼서 들보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래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에 나무로 대들보를 만드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매우 굵고 큰 나무 둥치인 들보가 눈 속에 들어갈까요? 들어갈 수도 없지만 들어간다 해도 작은 눈이 큰 들보에 가려지면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눈에 뵈는게 없어집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나무라는 네 눈이 들보에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티를 가지로 나무랄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지적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분 있습니까? 꼭 이 표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들보에 가려진 사람인데. 내가 누굴 지적한다고 하는가? 나나 똑바로 하자.

천주교에서 한동안 “내 탓이오” 스티커를 붙이기 운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차에도 붙이고 내 물건에다 붙이고 보면서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살펴보라는 뜻이겠죠. 그런데 문제는 내 탓이오를 내가 보는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데다 붙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차 뒤에다가 내 탓이오. 여러분 차 뒤에 나는 볼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내 탓이 아니라 뒤에 있는 사람의 탓이라는 거죠. 내 탓이오는 내가 보는데 붙여야 됩니다. 내가 문제다. 나는 더 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다. 나나 똑바로 하자.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절과 4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선 나를 먼저 살피고 반성하고 겸손히 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또 하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웃기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베스도가 아그립바왕에게 이 골치 아픈 바울 재판을 의뢰했더니 아그립바왕은 22절 다음날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을 만나러 아그립바가 오게 되는 것이 23절입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여러분 지금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무슨 결혼식을 하러 들어옵니까? “크게 위엄을 갖추고”라는 단어가 좀 웃겨 보입니다. 이 크게 위엄을 갖추고는 헬라어 판타시아를 쓰는데 판타조에서 파생된 말로 화려하다. 휘황찬란하다 하는 표현입니다. 철저히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보이는 행동이죠. 사실 이 버니게는 유대 전쟁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을 때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피하도록 권유하는 그런 때에도 최대한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아그립바 옆에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근엄한 재판정에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치렁치렁 온갖 장식품을 달고 입장했다고 생각해 보십쇼. 이 얼마나 분위기 못 맞추는 모습이고 추한 모습입니까?

왜 이 부부, 실제로 근친상간한 남매가 왜 이토록 외모, 겉모습으로 그 위엄을 드러내려고 했는가? 실제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가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이 부부가 혼인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동생 버니게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면 아주 어린 나이에 알렉산더의 아들 마르쿠스와 결혼했었고 남편이 죽자 삼촌인 칼키스의 왕 헤롯과 재혼했다가 또 남편이 죽자, 친정으로 돌아갔다가 길리기아의 왕 폴레몬과 결혼했다가 싸워서 파경하고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다가 친오빠와 눈이 맞아 이룬 부부였습니다. 당시 만인이 아는 소문난 음란한 여인이 바로 이 버니게였다고 하니 어떠했겠습니까? 실제 행동은 너무 추했던 여인과 그 오빠 헤롯 아그립바 2세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왕관을 쓴들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예수님은 마가복음 12장 38절 이후에 서기관들에 대해서 그들의 가증스런 외식하는 모습에 대해 이렇게 꼬집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혹시 아그립바왕이나 버니게처럼 혹은 서기관처럼 겉만 화려한, 속에는 남모를 추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그저 겉모습에만 치중하는 외식하는 자가 아닌지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자격도 없는 추한 죄에 쉽게 빠지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져 주시고 죽어주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받은 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겉모습 물론 하나님 앞에 올 때 가장 깨끗하고 아름답게 와야 하겠지만 겉모습만큼 내 내면의 모습을 진심으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흰눈보다 더 희도록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이 웃기는 재판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신실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정말 왕 앞에 서서 복음 전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부활의 주님이 눈이 먼 바울을 만나게 될 아나니아에게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분명히 아나니아에게 말씀 하신 그대로 바울은 수많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하신 그대로 “임금들과”, 여기 아그립바왕이 신분이 누구입니까? 아그립바왕입니다. 실제로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토록 말씀 하신 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25년이 걸렸지만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몸에서 나온 아들 이삭을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렇게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분명히 우리가 심은 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뿌린대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믿고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이 땅에 수많은 웃기는 재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놓칠 수 없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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