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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새벽예배 2022.05.03 |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 이선기 목사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절.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새벽 묵상


어떤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업을 하는데도 영 사업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는 1,000년 이란시간도 하루 같은 시간 아니십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나는 영원한 존재이니 네가 한 말이 맞구나”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이 사업가가 다시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1,000만 달러도 하나님께는 1달러나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그 말도 맞단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생겨났지”

“그렇다면 하나님, 제게 지금 1달러 같은 천만 달러를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알겠다. 기분이다. 1초처럼 지나갈 테니 딱 천년만 기다리거라”라고 하셨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참 똑똑한 것 같고 대단한 것 같아도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형상대로 지어주셨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라 하셨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잠시 동안만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잘 관리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요 내가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 맡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인생임을 마음속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 이사야 55장 8절-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셨는데 가장 깊고 가장 높고 가장 신비한 것은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계시는 오직 하나님의 생각, 뜻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고린도교회에 분쟁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누가 세례를 주었는가에 따라서 분파가 나누어진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 되라. 하고 권면했던 바울. 오늘 본문에는 조금 더 시각을 넓혀서 사회적으로 고린도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이성적인 철학에 대하여 사람의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 기준인 철학을 좇는 것은 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따르라. 십자가의 도야 말로 어느 철학도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철학 중의 철학이요. 진리 중의 진리요 참된 도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깐 살펴보시면서 십자가의 도, 즉 복음의 핵심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시고 분명한 교훈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첫 번째로 바울은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십자가의 도를 통한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19절 보십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이 구절은 이사야 29장 14절을 인용한 부분입니다. 70인역 성경에는 폐하리라가 아니라 가리워지리라로 되어 있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자들과 총명한 자들을 폐하거나 가리워지게 하시는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인용부분 이사야 29장 14절 바로 앞에 13절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즉 마음 중심으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입술로만 공경하는 척 했다는 것, 그러기에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신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사울왕이 두 번째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이번에도 저번처럼 하나님 없이 제사장 없이 예배를 때우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말고 한 번 더 기회를 줄테니 아말렉과 싸울 때에 생명 있는 것은 다 죽이라는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어떻게 되었습니까? 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가지고 오고, 좋은 양과 소를 살려가지고 옵니다. 그리고는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좋은 양과 소는 살려가지고 왔습니다. 입으로는 정말 번지르르하게 설득력 있게 좋은 양과 소를 살려가지고 왔나이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그 마음이 하나님께서 먼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왕이여 제사보다 순종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버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에서 부자들이 하는 헌금은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한 헌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은 가진 것 전부를 드린, 마음 전체를 드린 최고의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이 여인이 가장 많이 넣었느니라. 당장 눈에 보이는 양이나 그 질보다도 마음 전체 마음 전부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바리새인의 서서 사람들 다 듣도록 하는 형식적인 기도보다도 가슴을 치며 멀리서 고개도 못 들고 통곡하는 세리의 기도가 참 기도라고 하시는 예수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지를 가장 중시 여기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수도원이 성황하던 시절 안토니오라는 한 수도사가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수도를 하다가 이쯤 하면 되었다는 자신감을 안고 수도원을 나왔습니다. 그때 마침 수도원 문가에서 구두 수선공이 신발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수도사는 그에게 신발을 고쳐 달라고 맡기고 잠깐 기다리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식구가 몇인가요?”

“아이들 여덟에 아내와 저, 이렇게 열 식구입니다.”

“아니,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요? 그 많은 식구를 부양하려면 신발만 고쳐서 버는 돈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 구두 수선공은 아무 대답 없이 머리도 들지 않고 신발만 꼼꼼하게 기우다가 잠시 후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다만 주님의 종들이 오랫동안 편하게 신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신발을 수선해 드릴 뿐입니다. 제 가족의 삶이야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그 수도사는 자기가 아직 구두 수선공 보다도 마음수련이 한참 덜 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어느 정도 되십니까?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직접 뵐 때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쭈뼛쭈뼛 저~ 기둥 뒤에 숨어 분위기를 살피겠습니까? 아니면,.. 그간 늘 나와 동행하시고 대화 나누던 그 주님을 직접 만난다는 생각에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나님 품에 달려가 그 품에 안기시겠습니까?(박지성 선수가 히딩크 감독에게 안기듯이 말이죠.)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 주님이 날 보고 계시지.’ ‘우리 주님이 내 사정을 다 알고 계시지’ ‘우리 주님이 지금 나에게 최고의 것을 주고 계시지’ 하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과 어느 정도로 친밀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입술로만 형식으로만이 아니라 정말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여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여 드리자 말자에 대해 우리는 상의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도,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인간의 몸으로 그 모든 고통을 겪게 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도, 그 가장 큰 자식의 목숨을 빚진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도로 용서받는 저와 여러분 마음속에 감격이 되살아 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바울은 바로 이 십자가의 도의 감격으로 20절에 세상에 지혜롭다 하는 이들은 다 헛될 뿐이다. 표현합니다. 중간에 “도대체”를 넣으면 그 본 뜻이 드러납니다. 20절 “지혜 있는 자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세상 전체에서 지혜자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선비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우리 한국 신앙의 선배님들이 이걸 선비로 번역했는데 유대 사회의 최고 지혜자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이 세대에 변론가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즉 (당시 헬라 세계에서 변론과 철학에 능한 괘변자를 지칭합니다. 세상 전체의 지혜자, 유대 최고 지혜자, 헬라 철학의 괘변자가 어디 있느냐?” 즉 다 헛될 뿐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과 9절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십자가의 도를 붙들고 헛된 것을 버리고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해 보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3절 보십시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들이 몹시 원하는 어떠한 표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일 뿐이었습니다. 한편 이방인들은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어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명쾌한 명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련하게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본질, 십자가의 도는 그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신비한 표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해가 되는 그 어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임을 또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펴며 기뻐했던 이들 이들의 속마음은 예수님께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셔서 사회적 해방을 이루는 표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그리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회적 쿠테타가 아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수 많은 병자들을 말씀으로 어루만지심으로 손을 대심으로 심지어 침을 뱉아 흙을 문지르시는 실제적이고 신비한 일을 행하는 분이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무슨 드라큘라를 떨게 만드는 어떠한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실제적이고 신비한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도를 통해 약함이 강함이라고 반전의 교훈을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25절 보십쇼.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음과 약하심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압제된 이스라엘을 뒤집어 포로생활에서 벗어나는 강한 지도자가 아니셨습니다. 강함이 아니라 약함 즉 십자가에서 극악무도한 죄인이 죽는 그 방법으로 가장 약하디 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죽어주심. 그게 십자가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인 안질을 고쳐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보면서 이렇게 깨닫고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그 최고의 가치를 인정하고 정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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