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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되 곡하지 말고 조언하되 협박 하지 말라

새벽예배 2023.05.17 | 사무엘하 19장 1-8절 | 이선기 목사




사무엘하 19장 1-8절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새벽 묵상


제 큰 딸이 저처럼 땀이 많은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엄마 젖을 먹는 동안 코 끝에 땀이 송글송글 나도록 먹는 모습을 보면서 애 엄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고! 여자 애가 땀이 많으면 어떡하니? 나중에 얼굴에 화장해야 하는데 다 번질텐데...그런데 저는 왠지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왜 미소지었을까요? 예 땀이 많은 걸 보니 내 딸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딸은 다른 사람보다 그림을 조금 더 잘 그립니다. 이번 mother's day에 엄마에게 그림을 그려서 카드를 썼는데 정말 잘 그렸더라구요. 얼마나 흐믓하던지 저는 또 미소지었습니다. 제가 그림에 소질이 조금 있었는데 둘째 딸도 역시 내 딸이 맞구나. 신기하네 아빠의 특징을 최소한 하나 이상 닮은 딸들의 모습이 왜 그렇게 신기하기도 하고 흐믓한지.. 자녀들이 부모의 모습 중에서 좋은 부분만 닮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좋은 게 있으면 나쁜 부분이 있는 법, 부모가 그렇게 나쁜 부분을 닮지 않기를 바라며 애를 썼는데도 부모님의 안 좋은 부분을 닮으면 얼마나 속상할까요? 건강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가진 질병을 자녀도 똑같이 유전으로 가지고 있을 때 얼마나 속상할까요?

특별히 질병이 아니라 부모가 지은 죄를 자녀가 똑같이 저지른다면 또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여러분 방금 전에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알아 차리셨을텐데 오늘 본문에는 어제 본문 맨 마지막 부분 13절에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다윗이 통곡하며 외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4절 보십쇼.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지난 월요일에는 이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다윗에게서 죄지은 아들이지만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했었고, 어제 새벽에는 이렇게 통곡하는 다윗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매튜 헨리 목사님의 주석을 함께 나누었는데 오늘은 또 다르게 과연 이렇게 아들의 죽음을 괴로워하며 슬퍼하는 다윗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에서 “내”자를 부각시면서 읽으시면 다윗의 속마음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4절을 다시 한 번 “내”자를 강조하면서 읽어보시죠.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내”자를 강조하면서 읽어보니 뭐가 느껴지십니까? 예 다윗이 이토록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고 괴로워한 것은 바로 다윗 자신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실 압살롬 말고도 또 아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성경에 나온 기록을 토대로 다윗의 아들을 총 19명 혹은 2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다른 아들들 말고 이토록 압살롬을 특히 그리워하고 그의 죽음을 가장 힘들어했는가? 압살롬이 다른 아들들과 다른 것, 즉 다윗이 지은 죄를 똑같이 저지른 가장 다윗을 닮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압살롬의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다윗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동안 압살롬과 관련지어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약간 다르긴 하지만 똑같이 답습하는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큰 책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자신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것처럼, 압살롬이 다윗이 성에 남겨 놓은 후궁들 10명을 대낮에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겁탈했다고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내가 지은 간음죄보다 더 큰 10배의 간음죄를 짓는구나. 다 내 죄 때문이다. 처음에 암논이 압살롬의 친동생 다말을 겁탈할 때에 내가 다말에게 개인적으로 암논을 돌보라고 했으니 나 때문에 동생의 겁탈당함을 보고 압살롬 네가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2년을 기다려서 형 암논을 살해한 것, 그것도 내 죄값이다. 내가 우리아의 아내와 범한 죄를 덮으려고 우리아를 불러내었다가 맘대로 안 되어 일부러 그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는데 내 살인죄가 네게도 답습되었구나. 다 나 때문이다. 요압이 너를 도로 내 곁으로 오게 했는데 왔는데도 너를 부르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네가 반역을 하고 내 생명을 위협하여 나를 도망자가 되게 했구나. 그것도 네 죄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바로 내 책임이다. 아비로서 미안하구나 내가 참 무책임했구나. 내 죄값을 네가 그대로 다 받았구나. 여러분 이게 바로 다윗의 속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대하며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하면서 큰 소리로 끊임없는 통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끝에 슬퍼하시나이다 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바카라는 단어인데 바카는 초상집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혼자만 장례를 당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다윗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기가 모든 죄의 근본 원인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참 은혜로운 일인데 그 속내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무안하도록 백성들이 목숨 걸고 수고함으로 거둔 승리에 대하여 오히려 부끄럽도록 너무 크게 괴로워하며 통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2절과 3절 보십시오.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얼마나 어리둥절 했겠습니까?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벌여야 하는 자리에 분위기를 다 깨고 절규하는 다윗왕, 그 다윗왕 눈치 보느라고 조용히 자기 집으로 가야만 했던 백성들.

우리는 여기서 첫 번째로 1. 슬퍼할 수는 있으나 다윗이 이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다 무안하도록 통곡한 것은 아주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아무리 그립고 애달픈 아들이지만 우선 압살롬의 반란으로 상처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속을 다져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사로잡혀서 이미 변해버린 압살롬의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려 했던 모습과 죽었다는 소식에 절망하는 것은 올바른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3-14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고 고백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의 원인은 다윗에게서 출발했지만 분명히 압살롬 개인의 잘못된 분노 조절 실패와 살인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요, 아버지를 반역하고 욕보인데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었습니다. 통곡은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공정한 방법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알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시면서, 앞만 향해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다윗이 과거에 집착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통곡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요압장군이 나섭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다윗왕의 문제를 지적하고 나섭니다. 5절 보십쇼.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다윗왕의 통곡하는 행동이 얼마나 신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했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하는 표현합니다. 그리고 6절도 보십쇼.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여기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의 미워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압살롬입니다. 반역하여 나라를 위태하게 만든 적이었던 압살롬은 사랑하시며, 그 다음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누구죠? 예 다윗의 군대들, 다윗을 위해 목숨걸고 싸운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왜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십니까? 하는 질책의 표현입니다. 멸시하심이라는 약간 강한 표현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아들 압살롬 때문에 지도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다윗에게 합당한 조언이었습니다. 여기까지의 조언, 6절 중반까지의 조언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됩니다. 6절 그 다음 문장 보십시오.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바로 이 문장에서 우리는 요압이 선을 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압은 조언을 하기는 했는데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신하와 왕의 관계를 넘어서서 이제는 조언이 아닌 협박까지 하고 있습니다. 7절 보십쇼.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여러분 이렇게 말하는 요압은 다윗과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과 왕의 관계였는데 사적으로는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압장군은 너무 가까운 관계여서 그런지 기본적인 신하의 위치를 넘어서 지나친 말로 할 수 있는 협박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김정은이었다면 요압은 바로 숙청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지나친 조언 아닌 조언 때문에 요압과 다윗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다윗은 요압 다음에 지휘관으로 아마사를 세웠는데 요압이 이 아마사도 죽이게 되고 점점 요압과의 관계가 멀어지더니 결국 나중에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할 때 보시면 솔로몬에게 이 요압을 꼭 죽이라고 명하게 됩니다. 요압은 허겁지겁 여호와의 장막 안으로 도망가서 제단 뿔을 잡지만 솔로몬의 명령을 받은 브나야의 칼에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2. 두번째로 조언은 하지만 지나친 조언은 슬픔과 고통을 당한 이에게 오히려 더 큰 고통과 아픔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조언이라고 계속 말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말이 오히려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명의 친구들이 처음 욥을 찾아왔을 때 아무 말 안하고 욥 곁에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욥은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재산도 다 잃어버리고 자녀 10명도 다 죽어버린 욥, 몸에 병까지 생겨 기와로 몸을 긁고 있는 욥에게 친구들이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문제는 그 세명의 친구들이 한참 후에 조언이랍시고 말을 하면서부터 욥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네가 죄 지은 것이 있으니까 이 고통을 다하는 것이 아니냐? 빨리 이실직고해라 알지 못하는 죄이지만 분명히 죄가 있다. 욥은 이 친구들이 왜 와서 이렇게 나를 괴롭히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좋은 말도 조언이 아니라 협박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 그저 손 잡아 주는 것,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말로 환자들을 고치시기도 했지만 행동으로 그들을 어루만져 주셨고 만져 주셨고, 울어 주셨던 분이십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보시고 죄를 묻는 군중들 속에 들어가셔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신 분이셨습니다.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말없이 십자가를 져주심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조언이 아니라 곁에 계심, 대신 십자가 지심, 대신 죽어주심이 주님의 방법이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런 주님의 모습을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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