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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별 주관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3.08.19 | 사도행전 23장 31절 - 24장 9절 | 구진모 목사




사도행전 23장 31절 - 24장 9절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새벽 묵상


바울이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가이샤라로 이송되었습니다. 로마에서 총독이 유다 전체를 다스리도록 파견하는 장소가 어디냐 하면 가이샤라입니다. 바울이 이제 가이샤라에 왔습니다. 그래서 총독 밑에서 정식 로마식 재판을 받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재판의 모습이 1절에 나타납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예루살렘에서부터 누가 왔습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왔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대제사장이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나이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 먼길을 바쁘게 달려 온 겁니다. 이런 걸 보면 얼마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일치단결 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는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이다”고 말 합니다.


이 말은 유대의 가장 큰 지도자가 자신들을 압제하고 있는 총독앞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참 치사한 아첨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이완용 보다 훨씬 더한 역적같은 말입니다. 사실 이 벨릭스라는 총독은 총독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은 잔인한 총독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을 압제하는데 있어서 가장 악랄했던 총독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악랄한 총독에게 유대의 가장 높은 지도자가 하는 말이,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 때문에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너무 아첨하는 말로 바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고소하는 내용이 5절과 6절인데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 6절에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보면 바울을 세 가지 죄명으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사람은 전염병입니다. 이 말은 이 사람을 가만두면 잘 못된 병이 옮아갈 겁니다. 저 인간이 가는 곳마다 어디서든지 소동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유대민족이 조용하기를 원하시면, 소요를 그치길 원하신 다면, 저 골치 덩어리 전염병과 같은 존재를 없애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죄명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겁니다. 이 말은 로마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자신들의 신으로 떠 받들면서 그 예수를 해방자라고 추종하는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위험한 혁명분자들이라는 겁니다. 로마에서 볼 때 혹시라도 이 바울과 우리와의 관계가 내부 종교 문제인 줄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저들은 절대로 우리와는 같지 않은 불법종파입니다. 그런 이단의 우두머리를 우리가 고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세번째 죄명은,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한다는 겁니다. 성전에는 유대인들만 들어 올 수 있는 곳인데, 그런 성전에 이방인들을 끌고 들어왔다는 겁니다. 이건 유대인과 성전을 모독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잡아서 체포했습니다. 그러니 심문을 해보라는 겁니다.


이들의 말이 참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에 대한 세가지 죄목을 보면 사실은 기독교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전염병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복음의 전파력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염병이 무서운 이유는 그 전파력입니다. 막 퍼져가는 이 전염병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겁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그런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도 이것은 인정 하셨습니다. 좋은 의미로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란 그렇게 생명력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복음이 전염병처럼 빨리 안 퍼지면 문제가 있는겁니다.


두 번째는 나사렛 이단이라는 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입니다.


사도행전 24:14절에 보면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이단이라 했다는 겁니다.


지금도 이단들은 문에 교회패가 붙은 곳만 찾아서 전도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로 잘 듣는 훈련이 되어있기 때문이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안들어여요. 그런데 교인들은 잘 듣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단은 기독교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도 말하고 예수님도 말해요. 그런데 문제는 끝에 가서 달라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뭔지도 모르는 생짜한테 가서 전도하는 것보다는 기초가 있는 사람한테 가서 어느 한 말씀만 살짝 바꿔 놓으면 이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신앙을 가진 자에게 이단은 접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유대인들의 회당에 가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겁니다.


세 번째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볼 때에 성전이란 아무나 오는 것이 아닌데,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는 그런 구별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예수가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고, 그래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언제나 다같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볼 때는 성전을 모독한 사건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도 차별이 없다는 이 구원의 보편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 가지 말로 고소를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이렇게 바울같이 옴짝딸싹 할 수 없이 갇힌 것 같은 삶이 무의미 한 것 같은 그런 시간이 옵니다. 어느 글을 보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큰 일을 이루시기 전에 고립현상을 주신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태풍이 오기전에는 바람도 없고, 고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큰 일을 이루시기전에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갇힌 것 같은 고립된 상황을 만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립된 답답한 환경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시고,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시고, 또 한 편으로는 미래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런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을 경험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역 앞에 세우시는 겁니다.


그럼 이런 꼼짝달싹 할 수 없는 고립된 현상속에서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곳에 보내셨다. 그러므로 나는 올바른 곳에 있는 것이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여기서 깨닫고 배워야 할 것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런 현실속으로 인도하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은 선하셔서 지금도 나를 보호해 주시고, 여기서도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이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과 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앞뒤로 꽉 막힌 것 처럼 답답한 심정으로 이 새벽에 나와 계신 분들 있습니까? 이렇게 고백을 해 보십시오. 첫째로 “하나님이 나를 이런 환경 속에 보내셨다” 두번째로 “이 과정은 나를 잘 되게 하시는 훈련 과정이다” 셋째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날 건져 주실 것이다”


어둡고 고립된 답답한 환경에 계신 분들, 이런 믿음으로 최후의 복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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