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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세상을 다르게 산다.

새벽예배 2023.07.18 | 사도행전 12장 1-12절 | 이선기 목사




사도행전 12장 1-12절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새벽 묵상

“세상을 좀 더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책, 아들러의 심리학을 기초로 쓰여진 책이 있습니다. 부제가 “미움 받을 용기에 대해서”라고 되어 있는 책인데요. 한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어 유명했던 책입니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겪은 일들이 내 미래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내가 경험한 것들을 내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라 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문장들이 발견되는데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환경을 탓할 때가 많다는 것 “내가 금수저였다면 지금처럼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 부모가 나를 위해 유산을 많이 물려줬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을 텐데..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키가 10cm만 컸다면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보다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즉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비교하여 건전한 열등감을 가지라는 것이죠.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관계가 깨질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 사는 부자연스러운 삶이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눈치 보면서 살지 말고 나 스스로 나를 인정하고 나를 위해서 사는 능동적인 삶을 살라 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세상을 좀 더 다르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일반적인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 성도로서 세상을 다르게 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본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명히 이 일은 누가 보더라도 실패요. 절망할 수밖에 없는 고통과 슬픔의 사건인데 성도의 눈으로 살펴보니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요,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요,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감격의 사건이라는 사실, 보는 시각이 다른, 보는 눈이 다른 성도의 삶, 저와 여러분의 삶이 꼭 그런 삶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에 스데반 집사가 복음 전하다가 순교한 일로 믿음의 사람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핍박이 일어나면 모였던 이들이 슬금슬금 도망가고 축소될 것 같은데 믿음의 공동체는 오히려 더 크고 더 강하게 일어났다는 사실, 정말 핍박받은 초대교회는 웬걸 그 세력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어제 말씀 드린 대로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예수 믿기가 편한 시대 아닙니까? 아무 때나 누구나 언제든지 주의 전에 올 수 있는 그동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원했던 그런 자유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핍박과 고난이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교회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대를 잘 분변하시기 바랍니다.

흩어진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게 되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바울과 함께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안디옥에서 최초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가보라는 사람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천하에 큰 흉년이 들게 된다는 말씀이 있었고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흉년으로 힘들었을 텐데 감사하게도 제자들이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헌금을 모아 바나와 바울의 손을 통해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이게 어제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은혜의 역사와 믿음의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는 것과 더불어 강력한 핍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절 보십쇼. “그때에” 즉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흉년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 행위가 한참 진행될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제하려 하여” 여기 헤롯왕은 주님이 나신 때에 두 살 아래로 아기들을 죽이라 명령한 그 잔인한 헤롯왕이 아니라 헤롯왕의 손자입니다. 즉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이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가장 유대인들의 편에서 다스렸던 분봉왕입니다. 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2절에 보니까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절에 손을 들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왕의 신분을 과시하는 행동입니다. 소신대로 옳고 그름을 제대로 따져보기보다는 그저 대중이 원하는 대로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 중 세력이 큰 유대주의자들이 원하는 대로 그리스도인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자 죄 없는 사람의 목을 서슴지 않고 칼로 베어버린 헤롯 아그립바 1세, 한편 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휘두른 칼에 죽음을 맞이한 제자는 야고보였습니다. 이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라고 했는데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에 한 사람이었고, 사도 요한의 형제로 성격이 불같이 날카로워 형제 요한과 함께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까지 생겼던 제자였습니다. 성격이 불같아서 그런지 12제자 중 첫 번째로 불같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첫 번째 순교자 야고보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좋게 하기 위한 인생을 살 것인가? 하나님께 좋게 하기 위한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 것입니까? 1. 소망하기는 비록 길게 살지 못한다 해도 나를 지으신 분 하나님께 좋게 하기 위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그저 사람에게 좋게 하려고 유대인을 위해 일하다가 야고보뿐만이 아니라 3절 보십쇼. 유대인들이 기뻐하니까 또한 베드로도 또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4절 보십쇼. 결국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두고 군인 넷씩 네 패에게 맡겨, 즉 3시간씩 4교대로 24시간 쉬지 않고 지켰습니다. 그저 사람 눈치보고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생명 해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대중을 위해서 살인을 살인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시는 생명을 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모르고 사는 불쌍한 인생, 겉은 왕인데 실제로는 남을 죽이며 사는 부끄럽고 추한 인생, 반면 야고보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장 첫 번째 순교한 사도, 찬란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해진 하나님의 이치입니다. 호흡이 다할 때가 다 돼서야 후회하고 한숨 쉬지 말고 오늘 지금 영광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다르게 사는 사람, 거룩한 성도, 오늘 밤에라도 내 영혼 취하시면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 직전에 하신 표현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저와 여러분도 호흡이 다하는 그 순간에 “내 돈, 내 돈” 하지 마시고, 하늘이 열리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신비한 영광을 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신이 났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니 너무 흐뭇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쇳불도 당김에 빼자 하고 3절과 4절 베드로까지 잡아 옥에 가두었는데 3절 끝에 보시면 마침 베드로를 바로 죽일 수 없는 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잡으려 할 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여러분 무교절은 히브리 달력 니산월 14일 저녁 유월절 다음 날부터 21일까지 1주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은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무교, 누룩을 넣지 않고 급히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헤롯 아그립바는 지금 이 구원의 날을 지금 무슨 날로 지키고 있습니까? 베드로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잠깐 기다려야 하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7절 보십쇼. 잡힌 베드로를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옆구리를 쳐 깨우며 급히 일어나라 하시며 쇠사슬을 풀어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헤롯 아그립바와 유대인들은 구원의 날 주님의 제자 잡고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고 베드로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 성도들은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는 날이 되고 있습니다.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2. 두 번째로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날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보다도 그 구원의 감격, 애굽에서 그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에서 구원받은 날을 누구보다도 감격하며 지키며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해야 하는 유대인들은 지금 주의 제자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혹시 저와 여러분도 구원받은 감격을 고백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주일이 엉뚱한 날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주일 예배의 감격, 아니 새벽이고 수요 저녁예배고 모든 예배가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야 하고,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죽어 마땅한 이 죄인을 구원하신 것에 대한 뜨거운 눈물의 감사의 예배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일하는 것보다 은혜가 먼저 와야 합니다. 먼저 은혜 받고 일해야 합니다. 은혜 받고 성가대 해야 합니다. 은혜 받고 주방에서 일해야 합니다. 은혜 받고 부서에서 일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감격이 먼저입니다. 구원받은 감격을 절대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처럼 세상과는 다르게 비록 핍박이 오고 고난이 왔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에 비하면 그 은혜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육신은 고통을 당해도 이미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그런 성숙한 소망의 사람으로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고 살아가시길 세상과 다르게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기도가 달라지시길 바랍니다. 세상과 다른 기도의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7절에 천사가 급히 깨워 일어나서 천사를 따라 풀려난 베드로 10절에 보니까 첫째 둘째 파수를 그냥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쇠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을 체험하게 되고 마침내 12절 끝에 마가의 집에 이르게 되는데 내일 본문에 보면 로데라 하는 여자아이를 먼저 만나게 되고 로데가 놀라서 달려가 기도하는 이들에게 가서 베드로가 왔다고 보고하니까 네가 미쳤다 하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12절 끝에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라고 했는데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좀 오해해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석방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천사가 베드로를 살려내었는데도 믿지 않았다. 기도했는데도 그대로 믿지 않았던 이들 뭐 이렇게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여기 12절에 기도하고 있었던 이들이 정말 베드로를 석방시켜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9절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의 핍박에 대하여 이렇게 기도한 구절을 보게 됩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의 목표는 그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데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에 잡히어 죽게 되더라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 그게 목표였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감옥에 갔으니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바라기는 죽더라도 스데반처럼 그 죽음으로 인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게 그들의 기도였습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감옥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 병에서 다 낫게 하시고,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게 아니라 비록 육신은 고통당하고 심지어 죽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서 더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옵소서. 이게 그들의 기도였습니다. 저와 여러분 기도는 어떻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기도입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의 구원의 길이 다시 열리는 영혼 구원의 기도이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세상과 다르게 기도하는 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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