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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11.29 | 스바냐 3장 1-8절 | 구진모 목사




스바냐 3장 1-8절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의 망대가 파괴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새벽 묵상


미국 뉴저지 주 모리스타운에 살고 있는 전직 초등학교 교사 마티 겔트먼(65세)씨는 2001.6.23 자신의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을 초청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치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겔트먼 씨는 악성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암환자로서 종양의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해서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음을 인식하고 장례식을 미리 치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장례식을 미리 치른 이유는 자신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교사로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 왔는지 자신의 삶을 보아온 사람들의 솔직한 말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된 장례식에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아온 겔트먼씨의 모습을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에 대한 얘기를 들던 겔트먼씨는 한편으로는 감사하며 기쁨을 표시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회한의 마음을 갖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겔트먼씨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 가”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끝을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보다 가치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받는 신앙적 교훈은?


첫째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민족의 미래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왕족 스바냐 선지자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스바냐는 유다의 므낫세 왕의 타락으로 성전에까지 우상을 만들어 절을 하는 그런 상황과 그의 아들 아몬왕의 계속된 타락으로 백성들까지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음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바냐 선지자는 왕족 출신입니다. 이 말은 그는 부족한 것이 없이 잘 살았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백성들보다도 더 세속화 되고, 타락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스바냐 선지자는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던 겁니다.


오늘 스바냐를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시대에도 스바냐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안듭니까?



현대는 너무도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무엇입니까? 나 하나 잘살자고 나라와 민족 또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악한 일을 행하는 겁니다. 돈좀 더 벌자고 먹는 음식에 먹을 수 없는 물질들을 넣고, 공업용 옥수수를 식용으로 둔갑시켜 판매하고, 몰래 페수를 버려 사람이 마시는 식수원을 오염시키는 등 악질적인 개인주의가 판치고 있습니다.


또한 집단이기주의도 있습니다. 집단이기주의는 자기들만 잘살자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겁니다. 요즈음 국민들을 볼모로해서 하는 집단 불법 파업들이 그런 겁니다. 자신들의 파업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생각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까지 집단이기주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몇몇 대형교회들은 거대한 힘을 가진 세력단체로 변질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할 겁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신자라면 나라와 이웃을 위한 울부짖는 구국적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스바냐 선지는 당시의 타락한 지도자들을 향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면서 민족적 회개를 외치고 있습니다.


본문 3: 3-4을 보면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이리요 /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 당시 지도자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방백들이 누구입니까? 그 당시 정치적으로 지도자들입니다. 위장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리켜서 “부르짖는 사자”라고 했습니다.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은 다른 동물들을 제압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겁니다. 즉, 협박과 공갈로 공포를 조성해서 백성들이 자신들의 불법을 따르도록 만든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재판장들은 어떻습니까? 공의로 판단하고 재판을 해야할 판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결국 이들 재판장들은 자신의 욕심을 따라 뇌물을 받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라면 무슨짓이라도 한다는 겁니다.


또한 선지자들도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십시오.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랬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들이 거만하고 방탕하여 돈을 위해서라면 자신과 백성을 속이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는 자로 표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를 거룩하게 받들어야 할 제사장이 오히려 더럽히고, 먼저 율법을 준행해야할 제사장이 먼저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바냐 선지자도 그들을 향하여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스바냐와 같이 타락한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공의는 살아있다고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심리가운데 동화심리(同化心理)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러는데 나라고 특별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옛 말에도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니까 덩달아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군중심리도 그런 종류가 아닌가 합니다.


이단들의 집단에 가면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곳에 가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단이라면? 가짜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느냐?라는 생각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안심시키고 이단에 빠진다는 겁니다.


스바냐 당시의 백성들의 타락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지도자들의 타락과 세속화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타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백성들도 동화되어 타락의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같이 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날에 남은자들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지도자가 망할 길을 선택했다고 같이 망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타락한다고 나까지 타락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급속도로 타락의 길을 걸어갈지라도 깨어있는 성도로서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생활 하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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