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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09.07 | 히브리서 4장 12-16절 | 구진모 목사




히브리서 4장 12-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새벽 묵상


대게 사람들에게 어떤 힘겨운 일로 좌절이 될 때, 세가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술과 마약으로 현실을 잊으려는 방법이 있고 둘째는 포기하든지, 셋째는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도 숱한 위기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 세번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극이 승리로 바뀌어졌고, 고난과 슬픔이 은혜로 바뀌어 새롭게 되는 체험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나놓고 보면 대게 우리는 형통할 때, 건강할 때, 있을 때, 웃을 수 있을 때, 주의 은혜를 깨달으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힘든 일을 겪으면서 은혜의 귀중함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첫째로 오늘 본문 14절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고 말씀해 주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굳게 잡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굳게 잡을 때 힘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힘으로 잡으라는 겁니까?


1.믿음의 힘으로 잡으라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힘이 있습니다. 권력의 힘, 육신의 힘, 지식의 힘, 재능의 힘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힘은 모두가 세상의 힘입니다. 이런 힘으로는 통치를 하고, 거대한 빌딩을 세울 수는 있어도, 예수님을 붙잡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붙들 수 있는 힘은 오직 영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권력의 힘도 아니요. 지식의 힘도 아닙니다. 소경인 바디메오의 부르짖는 믿음의 소리였던 겁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으로 하여금 올려다 보게 한 힘이, 권력의 힘도, 물질의 힘도 아닌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이었습니다. 38년된 병자도 가나안 여인도 그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를 굳게 잡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뒤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올려다 보게 해야 합니다.


2.열심과 충성으로 잡아야 합니다.


로마서 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는데, 이 말씀중에서 “열심을 품고”라는 말은, 타오르는 듯한 열정적인 뜨거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성령에 의한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에 의한 이러한 뜨거움이란, 고린도전서 4:2절에 있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처럼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충성은 사람앞에 하는 충성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충성을 말하는 겁니다.


뜨거운 열정과 충성스런 믿음으로 주님을 굳게 잡고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히브리서 기자는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죄사함을 받는데는 피값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피값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심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께서 죄많은 죄인들의 편에 서셨던 겁니다. 그래서 죄인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기 위해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의 자리로 오셨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생과정에서부터 성장과정들이 모두 낮은 자리였고, 천한 자리였고, 가난한 자리였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자리는 항상 낮은 자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에 자기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했고, 나중에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짐을 가볍게 실은 배는 물에서 높이 뜨고, 짐을 무겁게 실은 배는 물에서 높이 뜨지 않습니다. 은혜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겸손해지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교만과, 거짓과, 불의와, 위선등을 넣으면 뜨게 됩니다. 이것이 곧 교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말씀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고, 은혜로 채워지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낮은 자리로 가게됩니다. 낮은 자리에서 나를 위해 오신 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7절에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때”란 어떤 기회나 시간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기회나 시간은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은 앞에는 머리가 있는데, 뒤는 머리가 없습니다. 이 말은 기회는 지나가면 잡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소중히 여기십시오.


은혜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때와 현실의 맞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든다면 가뭄이 들어 자연이 말라 있을 때 내리는 비는 참 고마운 비입니다. 그러나 그 비가 계속해서 내리면 이 고맙던 비가 수마가 되어 삶의 터전을 황폐하게 하는 겁니다. 태양의 적당한 에너지는 자연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지만, 지나친 태양의 강력한 에너지는 인간과 자연을 파괴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시도 때도 없이 내리면 은혜의 귀함을 알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가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해 있을 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혈루병 여인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고, 삭개오에게도 그런 은혜를 주셨고, 소경 바디매오 에게도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어서 불러 주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시간 간절한 마음을 부르짖어 주님께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귀한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체험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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