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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07.27 | 사도행전 15장 12-29절 | 구진모 목사




사도행전 15장 12-29절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새벽 묵상


초대교회는 두가지 견해로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과 둘째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 두 주장을 보면 모두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서 하는 주장입니다.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주장입니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도 좋은 주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도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서로 좋은 생각이지만 이 두 주장으로 교회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한 사람의 중보자가 필요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본문 13절에 보니까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야고보가 말을 합니다.


여기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공부해서 알지만, 이 야고보는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칼 같이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의 한 마디로 교회가 평안을 가져왔습니다. 야고보가 이 회의에서 이방인을 위한 바른 중보로 이방인의 선교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겁니다.


그럼 첫째로 교회가 얻은 이 아름다운 결론이 어떤 겁니까?


본문 12절을 보면,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그랬습니다.


의견이 나뉘어져서 사람들마다 너도나도 한 마디씩 합니다. 떠들썩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귀한 장점은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의 말을 듣습니다. 무엇을 듣습니까?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듣습니다. 이방인에 관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인 중에서 행하셨는지를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들을 귀 있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견이 분분할 때,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하신 일을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소아시아 지역에 엄청난 사랑을 쏟으신 것을 들었습니다. 구브로 지역을 찾아가셔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예수 믿게 했던 일부터 시작하여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구원 하기까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들었던 겁니다.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하셨음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그들이 생각해 왔던 것처럼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신 존귀한 존재로 생각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 한 사람도 예수의 피 값으로 사신 존귀한 존재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말씀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주님께서 값 비싼 피의 값을 치루셨다는 겁니다.


이방인에 관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일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 하시고,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듣게 하셨습니다.

두번째로 교회가 얻은 이 아름다운 결론이 어떤 겁니까?


본문 15절을 보면,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고 했고, 17절에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18절에는 “즉 예로 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야고보가 교회의 문제속에서 붙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예언한 '그 날'이 바로 지금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본문 16절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라는 말씀을 하면서,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당시 아모스는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아니라 다시 오실 메시야에 의한 세계관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아모스의 말을 인용한 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구약 시대에서부터 열려있었음을 확인하는 말이었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게 되는 목적이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므로서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기독교인됨이 구약의 예언 성취임을 밝히고 있는 겁니다.


세번째로 교회가 얻은 이 아름다운 결론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본문 19절에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절에 “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말라는 겁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왜 따지지 않습니까? 율법을 들이대지 않습니까? 단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따뜻하게 맞아 줍니다. 잔치를 베풉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분이십니다. 돌아온 이방인은 하나님께 돌아온 탕자와 같습니다.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


맏아들이 돌아온 탕자를 대하는 것처럼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율법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 존귀한 자입니다.


둘째는 이방인도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는 겁니다.


본문 29절에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 말씀은 언듯 보기에는 율법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섞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겁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하라는 말입니다.


이 회의 결론은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이방인을 위한 것임을 온 교회에 확증한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에게든지 소신껏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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