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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05.18 | 사무엘하 19장 9-15절 | 구진모 목사




사무엘하 19장 9-15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새벽 묵상


오늘 본문 내용의 배경을 살펴보면,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였다가 전쟁에서 요압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들은 다윗은 대성통곡하며 슬피 웁니다. 그러자 요압이 다윗왕을 찾아가서 다윗왕에게 “왕이 압살롬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니 전쟁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을 왕으로 섬기려던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다윗을 왕으로 다시 모셔 와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아마사를 지휘관으로 삼자 모든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모시고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길갈로 모였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사실 다윗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반역하고 왕의 자리를 차지 하려고 했던 압살롬은 남 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모든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능력과 재능도 있었습니다. 그의 외모 역시 건강하고 잘생겼습니다. 성경에 보면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외모로 크게 칭찬 받은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가만히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또 교만해져서 자기에게 주어진 이런 훌륭한 조건과 여건을 악용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를 쫓아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쫓기면서 사무엘하15:30에 보면 맨발로 울면서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 다윗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들은 대적하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대적한 압살롬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린 다윗의 눈물은 우리의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흘리는 눈물과 똑 같습니다. 아버지를 대적한 자식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눈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인간이 죄를 범했어도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눈물과도 같은 겁니다.  



오늘 이 압살롬의 모습은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녀들의 모습일 수도 있고,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야말로 잘 먹고, 잘 입고, 부족함 없이 잘 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외적 조건들이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의 일생을, 윤택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내적 신앙입니다. 



압살롬도 어렸을 때는 아버지 다윗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부모를 대적하는  빈껍데기 신앙이었습니다. 



왜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 청소년들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겁니까? 우리의 부모들이 내적인 신앙보다는 외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렇게 자녀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후에 그러한 자녀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후회하기 전에 하나님 중심, 신앙 우선 주의로 키우십시오. 학업이 좀 뒤진다 해도 신앙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치십시오. 그럴 때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자녀때문에 절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오르실 때, 많은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우는 여자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회개치 아니함으로 장차 후손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울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유대 민족은 회개치 아니함으로 멸망 당하였고, 그들의 후손들은 흩어져 유리하며 방황하게 됩니다.



또한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너희와 너희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하며 울며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울며 기도 할 때, 그 자녀는 망하지 않습니다. 울며 기도하는 가정,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친 자녀의 위기,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자녀를 위하여 우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어떤 종류의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오늘 다윗처럼 신앙으로 잘못 지도하고 가르친 자신의 잘 못을 후회하는 통한의 눈물입니까? 아니면 자녀들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인도해 주실 것을 간절히 원하며 울며 기도하는 기도의 눈물입니까? 



잘 아는대로 위대한 성 어거스틴이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이상 다윗 가정의 비극이 우리의 가정에 나타나서는 안될 겁니다. 



백혈병에 걸린 10살 짜리 '정다움'이라는 아들과 가난한 남편을 버리고 떠난 아내를 원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한 아빠의 이야기입니다. 아내는 화가와 재혼해서 외국에 나가서 삽니다. 이런 형편에 처한 ‘다움’이 아빠는 ‘다움’에게 늘 말하기를 “공부는 중요한 게 아니란다. 살아가는 걸 열이라고 한다면, 그 중 하나쯤밖에 안돼는 것이 공부”라고 말하고, 아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할 때 다움이 아빠는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때 아빠가 다움이에게 하는 말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싫은 일도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 주던 아빠요 남편이었습니다. 



다움이의 아빠는 자신의 삶 보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겠다고 병든 아들을 2년동안 지극 정성으로 돌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았습니다. 자신의 자존심도 팔았습니다. 양심도 팔았습니다. 마지막에는 팔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아들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골수이식 수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막대한 수술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돈은


없습니다. 그래서는 그는 불법인줄 알면서도 자신의 각막을 팝니다. 아빠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본래 신장과 눈을 팔려고 계획하고서 종합검진을 하는 가운데 자기 몸에 큰 간암덩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서 결국 신장은 팔수 없게 되었고 각막을 팔게 됩니다. 다움이의 아빠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아들을 살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합니다. 아들 대신 자기 목숨을 가져달라고 몸부림칩니다. 이렇듯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이는 다행히 골수이식이 잘되어 건강을 회복합니다. 그러나 정작 간암 말기인 자신은 죽어갑니다. 고침 받은 아들은 본래의 어머니에게로 떠나 보내고 자신은 아들과 40일 동안 함께 지냈던 산골 마을로 들어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어느 날 새벽에 다움이 한테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한 번도 가지 못했는데, 아들에게 한 그 약속을 지금이라도 지키겠다고 하면서 몸을 일으켜 달라고 해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방바닥에 대고 그 위에 이마를 포개고 기도하는 자세로 고요히 죽어갑니다. 



이 내용은 조창인 씨의 ‘가시고기’라는 소설책 줄거리입니다.



오늘도 가시고기처럼 결국 자식을 위해 모든 진을 다 쏟으시는 부모님께, 세대차이 느낀다고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해준 것이 뭐 있느냐고 따지면서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자녀들이지만, 그래도 당신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께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사랑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지난 시절에 다해주지 못한 것까지도 마음 아파하시면서 더 해주시고 싶어하는 마음인데, 


자식의 부모 사랑은 현재 무엇을 해드릴 수 있는가 보다는 지난번에 무엇을 해드렸는데 하는 생각을 지우지 않는 겁니다. 이제는 해 드린 것은 잊어버리고, 오늘 무엇이든지 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것이 곧 효도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우리는 해 주신 것은 잊어버리고 못 받은 것만 생각하고 원망하고 실망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금까지 내게 베푸신 은혜를 늘 잊지 말고, 항상 우리의 필요를 따라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주님께 나는 무얼 해 드릴까만 생각하며 신앙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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