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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05.04 | 사무엘하 14장 1-11절 | 구진모 목사




사무엘하 14장 1-11절


  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

  4.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5. 왕이 그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라 대답하되 나는 진정으로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 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7. 온 족속이 일어나서 당신의 여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우리가 그의 동생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그들이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8.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

  9.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10. 왕이 이르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하니라

  11.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새벽 묵상


형 암논을 죽인 후 압살롬은 그술로 도망하여 3년을 숨어 지냈습니다. 그 3년 동안 다윗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것이 자신의 허물로 인해 빚어진 일이어서 다윗의 마음은 더더욱 찌르는 아픔으로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하여 불러들이기에는 다윗은 너무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옳음과 그름 사이에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압은 다윗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왕에게 압살롬을 용서하고 돌아오도록 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드고아 여인을 등장시켜서 다윗 앞에서 말할 내용을 가르쳐 주고 연기를 하도록 했습니다. 



드고아 여인이 다윗 왕 앞에서 연기했던 역할은 아들 둘을 둔 과부였습니다. 드고아 여인은 남편을 사별한 과부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이 한 말은 이렇습니다. 자신은 남편이 죽고 아들 둘만 데리고 홀로 사는 참 과부인데, 이 아들들이 들에 나갔다가 서로 싸우게 되었고 말려줄 사람이 없어서 결국 형이 동생을 죽였는데 온 족속이 일어나서 동생을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야 하니 형을 내어 놓으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남편의 두 아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어 대가 끊어지게 됨을 호소하는 겁니다. 



이 여인의 호소에 대해 다윗은 본문 8절에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이 다윗의 이런 말에 본문 9절에 “드고아 여인이 왕께 이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의 말이 다 요압이 가르쳐 준 연기입니다. 그렇다면 요압은 왜 여인을 내세워서 다윗에게 이런 말을 할까요?



어쩌면 요압은 다윗 왕이 하나님의 규례를 세워야 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압살롬을 그리워 하지만 선뜻 돌아오도록 하지 못하는 고충을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이 모든 일을 이스라엘의 왕의 위치에서 바라보지 말고 부모의 심정에서 처리하라는 암시적인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 호소한 내용과 지금 다윗의 입장이 같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호소가 마음에 와 닿았는지 본문 10절에 “왕이 이르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 11절에도 중반부터 보면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다윗의 굳은 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이런 처사가 옳은 것인가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인의 말을 들으면 그 처지가 아주 딱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규례대로 동생을 죽인 아들을 죽게 하면  여인의 말대로 그 후사가 다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인의 말을 들어주면 하나님의 율법인  살인자를 죽여야 하는 규례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에서 다윗은 인정상 비록 살인죄를 지었지만 죽일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아들을 지켜주겠다는 말을 자신있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말이 갑자기 바뀝니다. 내일 묵상할 말씀이지만 삼하 14:13-14절을 보면 “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 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다”면서 이 여인이 결국 자신을 보낸 요압의 속마음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여인의 말의 내용은 이런 말입니다. 살인죄를 지은 자신의 아들을 지켜주겠다고는 하면서 왜 왕의 아들은 돌아오게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근거로 무조건 덮어주고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자비하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요압은 여인을 내세워서 다윗에게 비록 살인자이지만 아들 압살롬을 돌아오게 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보여주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어떻습니까? 이것이 맞는 말처럼 들립니까? 사랑, 자비, 용서, 분명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죽어야 할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무작정 모든 죄를 덮어 버리는 식으로 사랑과 자비하심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무조건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베푸신 사랑이고 용서라는 뜻이지, 모든 것을 그냥 봐주고 넘어가는 식의 사랑이나 용서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 대한 무장적 봐주기 식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죽어야 할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을 보지 않고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넘어가는 것이 사랑이고 미덕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지적하고, 자신의 죄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무작정 용서가 아니라 대신 죽으신 주님의 피로 이루어진 용서를 보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만큼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자신의 죄를 보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이 점을 잊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열심을 강조하며, 교회에 득이 된다면 다른 것은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실수도, 죄도 다 덮어지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죄도 봐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셔야 합니다. 봐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 값을 아들에게 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여인을 내세워서 압살롬을 돌아오도록 다윗을 부추기는 요압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고, 그러한 여인의 말에 대해 아들을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다윗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그겁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작정 심판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판을 이미 받으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심판을 보시고 우리의 심판을 넘어가게 하신다는 것이지, 죄도 그냥 봐주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작정 봐주는 것은 세상이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들을 죽이시는 아픔과 희생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어떤 해로움도 입지 않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서 그런식의 사랑과 자비를 요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나를 죽이지 않는 신을 원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죄가 그냥 넘어가기를 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내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시한번 오늘 본문을 통해서 깨달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 달리시고,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생각하시며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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