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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04.21 | 사무엘하 6장 16-23절 | 구진모 목사




사무엘하 6장 16-23절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새벽 묵상


교회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누가 기쁨으로 무슨 일을 하면 비난부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로 되려고 저러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누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칭찬부터 합니까? 아니면 비난부터 합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나 아내나 남편이 무슨 일을 하면 칭찬부터 합니까? 비난부터 합니까?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장미꽃을 사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보고 아내가 “왠일이야.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고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70년만에 들어오는 법궤이니 그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다윗이 너무나 좋아 춤을 추며 기뻐하였는데 그의 아내 미갈이 창문으로 그 장면을 본 겁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업신여겼다고 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 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고 했습니다. 즉, 미갈이 다윗을 비웃은 겁니다. 비웃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집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식구들에게 복을 빌어 주려고 돌아 오자 사울의 딸 미갈이 나가 다윗을 맞으며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체통이 참 볼만하더군요.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들보는 앞에서 몸을 온통 드러내시다니”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남이 하는 일을 보면서 비난보다는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결함이 많은 사람이 남을 비판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갈이 왜 다윗을 비난했을까요? 남편을 사랑하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겁니다.  남편인 다윗이 법궤가 70년 만에 돌아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왕의 체면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베옷 즉 평민의 복장을 하고 법궤를 맞으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왕의 체면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미갈은 다윗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남편이이 왜 그런지 모르고 자신의 체면만 생각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남의 하는 것을 비난하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생각해서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겁니다.  자신보다 더 잘해서  시기심이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칭찬보다는 비난을 늘 앞세웁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대단히 내성적이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사모님께 심방가서 가만히 있지 말고 그 집에 대해 무엇이든지 칭찬을 해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고 한 집에 심방을 갔는데 참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칭찬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이 있었는데, 예쁘게 수놓은 책상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은 수를 참 잘 놓았다고 한참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목사님 집에 선물이 왔는데 그 책상보를 잘 개서 다리고 포장을 해서 부친 겁니다. 그러니 그 목사님 사모님이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겠습니까? 그런데 다음 주일에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사모가 얼마나 탐심이 많은지 그 가난한 집의 책상보를 빼앗아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성도들이 모여 소근 소근 한 겁니다. 



느헤미야 4:1-3을 보면 유대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무너진 성을 건축할 때 많은 적들이 비웃었습니다.  도비야 라는 인물은 "너희가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말하며 비웃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욥의 아내가 얼마나 남편을 비난했습니까?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해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면 “네가 만약에 소자 한 사람을 실족케 하면 네 목에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깊은 바다 속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도 했습니다.  형제의 허물이나 약점은 사랑으로 덮어주고, 절대로 조롱하거나 비웃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면서 서로를 세워 주며 살기를 바랍니다. 



미갈이 아무리 비난한다고 법궤가 예루살렘에 오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에 맞지 않아 비난한다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워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비난한다고 이루워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소리지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봉사하는 것을 보고, 다른 성도들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칭찬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칭찬 한 마디가 사람을 움직이는 겁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을 보면 결코 천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담임 선생님은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적힌 성적표를 받아든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낙담해하는 아들을 오히려 달래며 “아들아,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단다. 네가 다른 아이와 같다면 너는 결코 천재가 될 수 없어”라고 칭찬하며 격려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칭찬과 격려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어떤 회사의 경리 책임자가 갑자기 자살을 하는사건이 생겼습니다. 경찰은 즉각 조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표면상으로는 자살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맡아서 했던 회사 장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쪽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쪽지에 “나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번도 칭찬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제는 진절머리가 난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니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라고 적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칭찬하지 못하고 비난한 미갈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남편의 사랑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여인이 되었고,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여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남편을 칭찬하거나 축복하지 못하고 조롱하고 비웃다 당한 결과입니다. 



이런 징계를 보면서 하나님도 너무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남편 다윗에게 도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려고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 많은 준비를 하여 축제적 분위기로 법궤를 모셔오려고 했는데 웃사가 즉사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보고도  너무하신다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여 붙잡은 것인데, 죽일 수 있느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레로 법궤를 운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어깨에 메고 이동을 해야 했습니다. 



불가피한 사정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말씀은 사정에 따라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다윗과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모델로 치신 겁니다. 



미갈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사람입니다. 사울의 집안이 다 망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다른 사람에게 가있던 미갈을 다시 불러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미갈은 하나님의 이런 크신 은혜를 모르고 자기의 자존심에 조금 손해가 되었다고 다른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보며 주님께 '왜 허비하는가?'라고 비난하는 가롯유다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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