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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화낌에, 내껀데, 너 때문에!

새벽예배 2022.10.21 | 창세기 38장 1-11 | 이선기 목사




창세기 38장 1-11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새벽 묵상


여러분 사람에게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 중에서 “죄책감”이란 감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죄책감을 언제 느끼셨고 잘 극복하셨습니까? 너새니얼 브랜든이라는 사람의 책 “자아 존중의 여섯 가지 기둥들”에 보면 이 죄책감을 벗어나는 5가지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1. 죄책감을 일으키게 한 행동을 한 사람이 바로 나임을 인정하라. 2. 내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동기를 이해하려고 애쓰라. 변명을 하지 말라. 3. 내가 피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내가 잘 인지했음을 알리고 피해를 입힌 사실을 인정하라. 4. 내 행동이 초래한 피해를 바로잡거나 최소화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하라. 5. 앞으로는 다르게 행동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라.

여러분 지금 어떤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다면 이렇게 해 보시면서 하루 속히 죄책감에서 벗어나시고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부터 문제가 일어나 입에 담지 못할 대 비극을 겪게 된 넷째 아들 유다의 결혼과 자녀들과 며느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우리가 특이하게 봐야할 것은 이 창세기 38장은 없어도 되는 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없었으면 딱 좋은 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대부분 설교하지 않는 장입니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비극적인 이야기들만 잔뜩 쓰여 있는 창세기 38장, 그럼 왜 없었으면 좋겠는가? 어제 본문 창세기 37장은 끝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고 애굽으로 가는 상인의 손에 팔았다는 이야기로 마쳤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38장 말고 뒤에 39장 1절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39장 1절이 이렇게 되어있는데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38장이 37장과 39장 사이에 들어가서 상당히 이상해 보입니다.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어제 넷째 아들 유다가 구덩이에 빠진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아버리자 제안하면서 요셉의 생명을 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를 이어갈 인물로서의 자격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 다음에 하나님의 축복권을 이어갈 사람으로 장자 르우벤은 배다른 어머니인 빌하와 통간했기에 땡이고 둘째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세겜 남자를 다 속이고 죽였기에 땡이다 그래서 넷째 유다로부터 하나님의 장자권의 축복이 내려가게 되었다고 학자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말씀드렸는데 오늘 38장에 보니 이 유다 또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이렇게 엉망인 유다를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이 더 대단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1절 첫 문장 보십시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하니라” 여기서 그 후에는 요셉이 애굽으로 사로잡혀 간 후를 의미합니다. 유다는 요셉이 떠난 후에 깊은 책임감,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나 때문에 동생이 죽었다는 무서운 죄책감, 그 괴로움이 날마다 유다를 억눌렀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갑니다.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하는 것을 보니 이제는 고향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아무든지 상관 없다 하고 막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2절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이스라엘 여인과 결혼하지 않고 그냥 아무나 동침하고 맙니다. 그리고 아들을 엘, 오난, 셀라 이렇게 셋이나 낳게 되는데 5절 맨 끝에 “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아내가 아들을 출산하는 데도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 아들 다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아무나 사귀고 아무나 결혼하고 아이를 향한 아무 애정도 없고 왜 그랬는가? 바로 동생 요셉을 팔아버린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죄책감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냥 나 오늘 마음껏 망가질 거야 하고 인생이 막 사는 인생이 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교훈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나 때문에”라는 책임감 죄의식이 이렇게 큰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이 회개하고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오히려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 때문에가 자기 파괴의 마음으로 발달되면 심각합니다. 예전에 한번 카톨릭에서 만든 차량용 스티커 “내 탓이오”에 대해서 말쓰드린 적이 있는데 이 내 탓이오를 내가 보는 운전석에 붙여놓고 책임감을 갖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차 뒤에 붙이면 뒷 사람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환경과 세상이 망가졌다고 하지 마시고 나 때문에 기뻐하실 하나님에 대해 꿈꾸시길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그렇게 부인하고 배신했는데 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시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말씀에 “나 때문에” 고생하셨죠? 고통스러우셨죠? 깨달은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서 순교하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그런데 가룟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 감격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주의 일을 더 힘 있게 감당하는 나 때문에의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는 화 낌에를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유다는 화 낌에 1절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친구가 아니라 그냥 세상 친구와 막 놀러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화 낌에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보고 데리고 동침했습니다. 동침한 여인 이름도 없이 그냥 수아의 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결혼은 화 낌에 해서는 안됩니다. 돈 보고 재산 보고 외모 보고 다른 이유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후회하기 쉽습니다. 그냥 좋아서 하루라도 안 보면 견딜 수 없어서 그래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화낌에 결혼 했으니 아들들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하셨습니다. 에스더서의 하만은 자기에게 인사하지 않는 모르드개에게 화가 났습니다. 하만의 민족 전체를 다 멸하려 했고 집 마당에 높은 장대를 세워 모르드개의 시체를 달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가 달렸습니다. 모든 재산이 몰수 당했습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니까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화낌에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화낌에를 잘 생각해 보면 화낌에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우리 속에 욕심 때문입니다. 내 욕심 때문에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만 보면 욕심이 납니다. 욕심 때문에 시기 질투심이 일어나고 사울처럼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세월을 허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화 낌에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 나봇을 거짓 증인 세워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왕비 중에서 가장 추하게 최후를 맞이한 왕비 성에서 떨어져 동네 개들이 와서 그 시신을 뜯어먹는 이런 비극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화낌에 하지 마시고, 화날 때는 눈을 감으시기 바랍니다. 욕심을 조심하는 것 여기서 3. 세 번째 교훈 “내 껀데”의 유혹을 조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유다가 이름도 모르는 수아의 딸에게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을 한번 보십쇼. 3절 첫째가 엘 이라고 했습니다. 이 엘은 7절 보시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십니다. 아마도 학자들은 유다가 엘을 위해 아내 다말을 데려왔는데 왜 갑자기 죽었을까? 연구해 보니 엘이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의 신 바알 아세라 신, 성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그 풍조에 따라 성적으로 문란했다고 하는데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윤리의식이 하나도 없이 양심도 없이 아내 다말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제 멋대로 쾌락에 따라 살아갔던 아들이었기에 즉 욕심에 이끌려 살아갔기에 그냥 죽이십니다.

이렇게 형이 죽으면 계대 결혼이라는 당시의 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의 남편이 되어 후사를 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8절에 유다가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아우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한 것입니다. 문제는 둘째 오난, 이름 뜻이 강한 자라는 뜻인데 너무 자기 욕심이 강해서, 즉 자기가 형수와 다시 결혼하면 낳은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니고 형의 아들이 되고 집안에 모든 재산의 권리가 자기가 아니라 그 아들에게로 돌아가기에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9절 보십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일부러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만듭니다. 철저히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에 보면 가짜 엄마가 죽은 아이가 내 아이고 산 아이가 저 여자 아이라고 우기면서 나중에는 뭐라고 합니까? 내 것도 되게 말고 저의 것도 되지 말게 하라 하지 않습니까? 남이 잘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내 조카나 내 형수가 잘되는 것도 볼 수 없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인간의 욕심, 이기심, 결국 이 욕심과 이기심을 보시는 하나님 10절 보십쇼.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늘 싸워야 할 것이 바로 이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니까 계속 잉태하고 장성하는 욕심과의 싸움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잘 싸워 이기시면서 건강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4. 마지막으로 책임전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기심을 또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었으면 유다는 원인을 잘 파악해야 했습니다. 문제가 엘과 오난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엘과 오난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며느리 다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11절 보십쇼.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분명히 다말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며느리가 스스로 친정 가 있겠다고 고집하지 않는 한 데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셀라가 자라서 다시 가정을 이루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생각이 지나쳤습니다. 형들같이 죽을까 두려워 다말을 친정에 보내고 맙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의 근본 원인은 바로 유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동생 요셉을 그렇게 만든 죄책감에서 시작된 막 살고 말지 했던 그 마음, 그래서 막 사귀고 막 결혼하고 막 아이 낳고 그러다가 이 비극을 맞이하게 된 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혹시 나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여 생긴 것들이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기적이고 욕심에 이끌리고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추한 우리들, 그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연약한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다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감사하며 감격하며 욕심과 싸워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하루를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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