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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특별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3.04.06 | 마태복음 27장 15-26절 | 구진모 목사




마태복음 27장 15-26절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새벽 묵상


지난 주일에는 이 본문으로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본문속의 빌라도와 성경속의 가룟유다와 예수님의 행한 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떤 손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야에 물을 떠다가 손을 씻은 빌라도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평소 예수를 미워하던 유대교의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마자 성전을 찾아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며 성전을 청결케 하자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체포했고, 사형집행을 위해서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로 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로부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특별한 부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망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칩니다. 



결국 유대인들과 갈등을 원치 않았던 빌라도는 예수를 성난 유대인들에게 내주고 맙니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은 있었는지 대야에 물을 떠다가 손을 씻으면서 본문 24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면서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 빌라도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내어 주는 손, 그리고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손입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책임을 회피합니다. 너희들이 잘못했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빌라도가 상당히 양심적인 사람 같지만,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야비한 수법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자존심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내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고서도 내 책임은 없다며 발뺌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항상 자신의 사명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손이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가룟 유다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배신의 손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제자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3년을 함께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신임을 얻었겠습니까? 그러나 3년의 주님과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도 가룟유다의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자신의 출세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한 발 한 발 가까이 가실 때마다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예수가 왕위에 오르기만 하면 자신은 지금도 회계일을 보고 있으니까 재무장관이라도 될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 가시면서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만 하십니다. 자꾸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십자가에 달리시면 자기들도 같은 운명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가룟 유다는 배신을 꿈꾸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장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바라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와 같은 그릇에 손을 넣은 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 음식을 먹을 때, 예수님과 가룟 유다의 손이 동시에 음식 그릇에 들어가서 서로 손이 닿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릇에 손을 넣은 자니라” 



가룟 유다는 깜작 놀랐습니다. 자기의 계획이 탄로된 줄 알았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혼자만 마음으로 계획한 일을 예수님께서 아신 놀라운 신성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리어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기대하시고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겨버립니다. 



가룟 유다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배신의 손이었습니다. 스승을 팔아서 은 30을 움켜쥐고 있는 탐욕의 손이었습니다. 



천재적인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나이 70이 넘어서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은 3단계입니다. 상단은 천국, 하단은 지옥, 가운데는 중간 부분. 천사들의 손에 이끌리어 천국으로 가는 사람과 뱀을 칭칭 감고 지옥으로 끌려가는 장면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인물은 모두 나체입니다. 출생할 때 나체였으니 심판을 받을 때도 나체여야 한다는 화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거룩한 성당에 나체그림이 가득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 옷을 입히기로 결심하고 화가를 수소문했지만 당대의 대가인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덧칠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많은 돈을 내걸었습니다. 거금에 눈이 어두운 화가 한 사람이 나체 그림에 덧칠을 했습니다. 그후 이 화가는 ‘기저귀 채우는 화가’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대작을 훼손한 손이 되어버린 겁니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이런 손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신의 손, 남을 배신하고, 골탕먹이고, 사기치고, 그리고 이렇게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거두어 드린 돈을 세고 있는 탐욕스런 손, 남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해 놓고, 돈을 세고 있는 손, 우리는 절대로 이런 손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세번째로 예수님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희생과 용서의 손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로 열심히 일하던 손이었습니다.  그 손은 떳떳한 손이요 부끄러움이 없는 노동의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30세가 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의 주님의 손은 어떤 손이었습니까? 


넘어진 자, 외로운 자, 죄지은 자, 병든 자, 슬픔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시고 붙들어 주시던 사랑의 손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손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새 삶을 얻었습니다. 



평생을 남을 위해 사시던 주님은 마지막에는 온 인류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신 아름다운 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손을 내미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 손은 의심많은 도마를 붙들어 주신 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을 확인하시며 양들을 맡기십니다.


그 손은 부인했던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사명과 책임을 주신 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손은 아름다운 사랑의 손, 희생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손입니다. 



1490년 대, ‘알브레히트 뒤러’와 ‘프란츠 크닉스타인’은 같은 동네 친구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생계가 어려워 그림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약속했습니다. 제비뽑기를 해서 이긴 사람은 노동을 해서 돈벌어 다른 친구의 그림공부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


알브레히트가 제비뽑기에서 이겨 그림 공부를 위해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프란츠는 수도원에서 장작을 패고 노동을 해서 번 돈을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부지런히 공부하여 미술계에 명성을 떨치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돈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프란츠, 그동안 고마웠네. 이제는 자네가 그림공부를 하게나”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친구의 손을 보는 순간 그 친구가 너무나 자신을 위해서 큰 희생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의 섬세했던 손가락은 이미 굳어있었고, 필수적인 섬세한 붓 터치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너무 미안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느날 알브레히트는 사전 약속도 없이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프란츠는 마침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내 친구 알브레히트가 크게 성공하여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그리도록 해주십시오” 그 기도를 들으면서 눈물흘리던 알브레히트는 얼른 그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이 그 유명한 <기도하는 손>입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그 손, 우리 주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손은 너무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냉정한 손은 아닙니까?



로마의 관광코스 중에 희한한 것이 있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주먹보다 약간 큰 구멍이 있는 데 ‘심판의 구멍’이라는 겁니다. 그 구멍으로 죄가 없는 사람이 넣으면 아무 일도 없지만 만약 죄가 있는 사람이 넣으면 악마가 그 손을 절단해버린다는 전설의 구멍입니다. 관광 안내원이 그 곳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넣지 못하더랍니다. 



사실, 옛날에는 이 구멍에 손을 넣었다가 짤리는 일이 있었답니다. 영주들이 구멍 안 쪽에 칼을 든 사람을 세워놓았다가 미운 사람이 손을 넣으면 그냥 잘라버렸대요. 그러니 그런 전설이 나올만도 합니다. 



오늘 여기에 손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분의 손은 쉽게 구멍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당당한 손입니까? 



우리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책임회피의 손입니까? 탐욕의 손, 배신의 손입니까? 아니면 우리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던 예수님의 손입니까? 



세상은 우리의 손에서 하나님의 손을 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손으로 다듬어져 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새벽 공동기도


1.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을 더욱 알고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2. 끝나지 않은 코로나가 힘을 잃고 멈추게 해 주옵소서! 


3. 사순절에 온전히 회개하고, 거듭남으로 온전히 주님을 닮아가게 해 주옵소서! 


4. 가정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며 치유와 평안을 느끼게 하옵소서!


5. 혼란스런 상황속에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6.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모든 병자들이 치유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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