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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더라. 동행하더니. 안위하리라!

새벽예배 2022.08.10 | 창세기 5장 1-32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5장 1-32절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새벽 묵상


여러분 여러분은 본관이 어디며 조상은 누구이고 여러분은 몇 대손입니까? 저는 본관이 한산입니다. 한산 이씨이구요. 우리 교회에서 한산 이씨이신 분 혹시 있습니까? 거의 찾기 어렵더라고요. 조상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 이색 길재 중에 이색이 바로 한산 이씨의 조상입니다. 제가 26대손이라고 들었는데 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왜 갑자기 조상과 본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족보이야기를 나눌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자면 오늘 본문의 족보는 그냥 단순 족보가 아니라 신앙의 계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삶 책에 오늘 본문 묵상부분의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신앙 계보를 이어가는 아담 족보”

우리 한국인들의 족보와 차이를 보이는 것은 한국인들의 족보는 조상, 처음 족보의 시작인물을 중요시 여기고 몇 대인지 그 숫자를 아주 중요시 여긴다든지. 양반이었는지 아닌지 지나친 계급주의적 족보인데 반해 또한 남존 여비사상이 짙은 남자들의 족보인지에 반해 오늘 본문 성경의 첫 족보는 최초의 조상 아담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담이 특별히 주목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고 최초의 조상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은근히 밝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최초의 조상이 아니라 맨 마지막 인물이 훌륭한 인물이다 하고 밝히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즉 내 이름이 마지막으로 쓰여질 텐데 각자 책임을 잘 감당하며 신앙의 계보에 이름이 귀하게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아니 앞장 4장을 보니 이미 가인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러면 오늘 5장의 족보는 성경 최초의 족보가 아니지 않느냐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가인의 계보는 하나님 없는 세상적, 세속적 족보이기에 신앙의 계보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인물들의 계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도 여러분 가족과 친척 집안 가운데 세상 족보보다도 신앙의 계보를 중시 여기고 비록 나부터 1대가 시작될 지라도 생각을 바꾸고 진지하게 기록하고 후대에 전달하는 신앙의 문서 선교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족보를 가보로 전달하는 것보다 신앙의 계보를 가보로 전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 인물들의 계보가 과연 어떻게 쓰여졌는지 그 특징들을 살펴보시면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1, 첫 번째로 오늘 본문 신앙 인물들의 계보에서 아주 자주 등장하는 단어 “죽었더라”를 살펴보시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과거가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4절부터 보십시오. 아벨 대신에 또 주신 아들 셋 이란 아들은 팔백 년을 살았는데 자녀를 낳고 5절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렇게 죽었더라라는 표현이 그 뒤에도 계속 등장합니다. 8절 끝에 죽었더라. 9절 끝에도 죽었더라. 14절 끝에 죽었더라. 17절에도, 계속해서 죽었더라가 반복되고 반복됩니다. 왜 그럴까요? 굳이 죽었더라라는 표현을 넣지 않았어도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라고만 표현해도 언젠가 죽었겠구나 하고 예상할 수 있는데... 왜 죽었더라가 반복되었는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죽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에덴동산에 살며 불멸할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불순종함으로 인해 죽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정말 죽는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땀을 흘려야 땅에서 소산을 얻을 수 있었고 여인은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신앙의 계보와 족보를 읽는 후손들이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그래 맞아 우리는 죽는 존재이구나. 영원히 살 존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겠구나. 살아있는 동안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구나. 시간을 아껴야 하겠구나. 아무리 대단한 인물도 죽음 앞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인간은 죽는 존재이구나. 정도까지만 알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가서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7장 9절에 아람 군대가 도망간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우리만 알고 즐거워하자가 아니라 왕궁에 가서 전하자 했던 그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누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전하시기 바랍니다. 기회 있을 때 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것은 이렇게 죽었더라만 계속 나오는 오늘 본문에 죽었더라와 함께 나오는 표현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뭘까요? “낳았으며”입니다. 4절에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6절 끝에 낳았고 7절 끝에 낳았으며 9절 끝에 낳았고 똑같은 패턴 12절에 “게난은 칠십 새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절 끝에 자녀들을 낳았으며 뒤에 절에도 계속해서 앞에 두 문장에서 낳았고, 낳았으며 그 다음이 죽었더라가 나왔습니다. 뭡니까? 생명을 귀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비록 인간은 죄를 지어 죽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사 계속 대를 이어가도록 생명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 하심으로 죽는 인간들의 숫자보다 더 많이 태어나게 하시므로 인류를 보존하시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여러분 이 하나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집중할 표현은 “동행하더니”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길게 살았던 사람, 그 수명이 가장 길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므두셀라입니다. 27절 보십쇼. 무려 969세를 살았습니다. 제가 미국 오면 제 영어 이름 하나 지어놓고 불리는 게 좋다고 해서 제가 생각한 이름이 바로 므두셀라입니다. 성이 이 씨니까 합치면 “므두셀라 리”가 됩니다. 괜찮은가요? 여하튼 므두셀라가 가장 오래 살아서 부럽습니까? 100년도 살기 어려운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한탄스럽습니까? 오히려 가장 짧게 살다 간 사람을 살펴보시고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명인데 대부분 다 900세 이상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10명을 평균 내어 보면 912세가 됩니다. 대단하죠. 그런데 딱 한사람만 365세를 살고 떠납니다. 21절 보십쇼. 누구죠? 에녹, 에녹이 몇 살 때까지 살았습니까? 23절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1년이 365일 아닙니까? 기억하기도 좋게 딱 365년만 살았던 에녹. 그런데 에녹이 부러운 것은 10명 중에 가장 짧게 살았지만 가장 하나님과 가깝게 살았고 심지어 죽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러분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이 참 좋은 복이긴 하지만 장수가, 꼭 오래 사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게 되었으니 짧게 살아도 하나님과 가깝게 사는 자가 진짜 복된 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과 가깝게 사는 것을 동행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 번 나오는데 22절 중간에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4절에도 보십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 보면 이 동행이란 단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렸더라”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그저 나만 위해 살고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며 장수하게 될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짧게 살아도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리면서 사는 동행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원래 지어진 목적이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는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새벽부터 찬송소리가 저와 여러분 가정에 저와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찬송이 넘치시기를 하나님과 동행함이 계속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짧게 살건 길게 살건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행,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시면서 사는 에녹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맨 마지막에 나오는 노아에 집중하시면서 “안위하리라”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이 쉼과 안식과 위로라는 뜻입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10대를 이어오면서 28절에 어제 나온 가인의 후손 중에 라멕과 동명이인인 다른 라멕이 힘들었는지 그의 아들을 노아라고 이름 지으면서 이렇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29절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열심히 일하면서 땀 흘리며 일해야 살 수 있다 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가운데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갈급하게 되는 쉼과 안식, 그 위로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었는지 라멕은 아들 이름을 위로라고 지었습니다.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 즉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 안식과 힘과 위로를 주시리라 그런 표현입니다.

뒤에 나오겠지만 노아는 이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의도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참 쉼과 안식의 길 위로의 길을 제시해 주었는데 세상을 물로 멸하실 때에 이 쪽 방향이 살 길이라고 방주에 들어가는 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외치고 외쳤습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짐슴들과 노아의 가족 8명만 그 안식을 얻을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 참 안식이 무엇인지 알려준 노아.

여러분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시면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구원의 길에 초청해 주시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대신 다 흘려주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 구원의 길 옳은 길을 분명히 알려주신 예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쉼과 안식과 위로는 구원받은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은혜임을 기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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