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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주시는 하나님

새벽예배 2022.10.10 | 창세기 32장 21-32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32장 21-32절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새벽 묵상


유현민의 “행복 수첩 속의 이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가위바위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 아빠랑 가위바위보 할까? 네가 이기면 부탁하는 것은 뭐든지 다 들어줄 테니까. 그럼 아빠, 내가 갖고 싶은 것 다 사 줄 거야? 물론이지. 네가 갖고 싶은 것은 아빠가 모두 다 살 줄게. 아버지와 아들은 그래서 가위 바위 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위바위보를 할 때마다 아들은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항상 가위를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들은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고 즐거움이자 낙이기도 했습니다. 아들은 가지고 싶은 장난감, 먹고 싶은 모든 것을 다 사달라고 했고 아버지는 즐거이 아들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버지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겨서 기뻐하는 아들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가 가위 바위 보를 할 때마다 아들에게 일부러 져 준 것을 아들은 아직 어려서 알지를 못합니다. 오직 주먹밖에 낼 줄 모르는 아들,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가락이 없어 조막손으로 태어나 오직 주먹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고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게 계속 지고 싶어합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자기가 주먹밖에 낼 줄 모른다는 것을 아들이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 아버지는 또 계속 져 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이 주먹밖에 낼 줄 모르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아버지이신 것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내가 무슨 능력이 있고 잘 해서 그런 줄로 착각하지만 참아주시고 일부러 져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왜 그렇게 죄송하고 또 감사한지요.

요한복음 21장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물으셨던 질문이 뭐였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똑같이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 보면 사랑하느냐? 의 사랑이란 단어가 다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가페, 목숨까지 내어줄 정도로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그런 사랑 아가페로 사랑하느냐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아가페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예 저도 아가페로 사랑합니다. 대답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계속해서 예 제가 주님을 친구처럼 필로스로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을 베드로의 답에 수준을 맞추어 그래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로스로라도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에게 맞추어 그 수준을 낮추신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께 맞추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맞추셨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베드로..일부러 져 주시고 맞춰주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야곱의 수준으로 맞추시는 하나님, 야곱에게 일부러 져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본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 금방 그 내용을 알아차리는 본문입니다. 여러분도 방금 전 읽으실 때에 22절을 읽으시면서 금방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나루를 건널새” “얍복나루?” 아! 오늘 본문 내가 잘 알아! 야곱이 씨름하는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가 생각나시는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처음 부른 찬송 368장에서 3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옛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을 주옵소서”라고 되어 있어서 정말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던 것을 간절한 기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연 야곱이 홀로 열심히 열정적으로 기도하여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로 기도하여 정말 하나님을 이기고 기도로 승리하고 이름도 이스라엘로 바뀌고 에서와 만날 때 평안히 담대하게 만나 화해를 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우선 21-23절만 살펴보아도 꼭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21절 보십시오.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에서 밤을 지내다가” 예물을 다 먼저 보내고 두려움 때문에 형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으면 어쩌나? 이대로 내 가족과 모든 것이 전멸하고 마는가?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21절 앞에 32장 7절부터 보면 막상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게 될 텐데, 20년 만에 가는 그 길, 옛날에 자신이 형을 피해 도망갔던 기억, 지금 형 에서가 군사를 400명이나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사자들에게서 듣고 야곱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렸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했는가? 자신의 재산과 진영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또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예물을 네 때로 나누어 보내기도 했습니다. 나름대로 이런 저런 방법을 총동원했습니다. 중간에 몇 절, 오늘 본문 앞에 9절에서 12절에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도 듣기는 했는데 그래도 야곱의 마음은 두려움을 온전히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극한 두려움 가운데 오늘 본문 22절 밤에 일어나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혹시라도 모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얍복 나루를 건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난 이제 여기서 끝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정말 끈질긴 기도의 사람이었다면 여기 21절에서 23절이 이렇게 쓰여지면 안 됩니다. 기도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나와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기도했다든지 제단을 쌓고 예배했다든지 따로 기도의 장소를 찾았다든지 뭐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습니다. 그저 두려움에 떨고 가족 걱정이랄지 예물과 소유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먼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1. 첫째로 인간은 소유에 약한 존재고 또한 두려움에 참 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어려움이 닥친 것도 아니고 그저 400명 군사 거느리고 온다는 에서의 소식을 들었을 뿐인데 금방 낙심하여 괴로워함으로 중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리라 네 자손을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해 주신다고 했는데도 두려움을 과감히 떨쳐내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 야곱의 모습, 특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밤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무서움에 휩싸여 혼자 괴로워하고 걱정하는 모습,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두려움에 휩싸인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장 29절에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감사하게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에 이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방법은 딱 두 가지 기도하고 간구하라. 그리고 감사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이 올 때 근심이 올 때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에 올 것에 눈을 감으시고 가까운 것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와 감사입니다. 오늘 새벽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간구하시고 가까운 것 생각하시면서 감사하시고 이 두 가지를 열심히 하시다 보면 어느 새 두려움이 떠나가고 근심이 지나가게 될 줄 믿습니다.

야곱은 기도도 없고 감사도 없고 그저 이렇게 걱정 근심하다가 두려워하다가 24절 홀로 남았는데, 홀로 기도하려고 남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홀로 힘없이 남게 되었습니다. 24절 다시 보십쇼.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여기서 씨름이란 단어는 아바크란 히브리어인데, 이 아바크는 먼지를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뜻으로 단단히 붙잡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가 특별한데 이 어떤 사람을 천사로 해석하기도 하고 하나님으로 또는 예수님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먼저 씨름을 한 것이 아니고 야곱이 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즉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을 찾아오셔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그저 두려움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야곱을 먼저 찾아오셔서 함께 뒹굴며 먼지를 일으키면서 야곱을 정신 차리도록 한바탕 몸싸움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두려움과 걱정 근심에 싸여 헤롱헤롱 하고 있는 야곱을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여기서 두 번째로 2.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와 씨름하시면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감리교 신학에서는 선재적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데,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삶에 오셔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 이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25절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이것도 또한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구조원이 물에 빠진 사람에게 바로 가지 않고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린다는 사실 아십니까? 아니면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도 안보이게 뒤로 다가가서 목 뒤를 갑자기 때려서 기절시킨 다음에 구조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둘 다 물에 빠지지 않게 되고 온전히 구조된다는 사실, 여기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어긋나게 하신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네 힘을 완전히 빼라. 네 힘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하나님, 내가 너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이 빠져있거나 홀로 두려움에 싸여 있을 때 내 삶에 개입하시고 나를 때리셔서라도 정신 차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때려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야곱을 때리시고 정신 차리게 하셨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하시면서 이름까지 이스라엘로 바꾸시는 져 주시는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환도뼈를 다치고 힘을 못 쓰면서도 그래도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26절에 떠나려는 어떤 사람을 붙잡고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다고 떼를 씁니다. 여러분 이렇게 떼쓴다고 못 가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뿌리치고 가면 그만이신데 하나님은 27절에 이름을 물어보시고 28절 야곱이라는 이름 속이는 자라는 이름을 바꿔주셔서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싸워이겼다. 하는 이름을 주십니다. 지금 누가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가위 바위 보를 져 주는 아버지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야곱을 정신 차리게 해 주시고 비록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하셨지만 이름을 바꿔주셔서 승리자로 세워 주시는 하나님. 30절에 보니까 야곱은 이렇게 져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감동해서 고백합니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즉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 즉 하나님과 만나는 감격, 나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그 구원의 하나님과 얼굴로 대면하듯이 가깝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 주심을 보여주신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독생자를 희생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대신 죽게 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살려내신 구원의 역사, 이것보다 더 큰 사건,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평생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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