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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그치고 영적 전쟁에서 이기라!

새벽예배 2022.06.22 | 에스더 9장 1-16절 | 이선기 목사



에스더 9장 1-16절


  1.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2. 유다인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 각 읍에 모여 자기들을 해하고자 한 자를 죽이려 하니 모든 민족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고

  3. 각 지방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과 총독들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므로 다 유다인을 도우니

  4.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하매 이 사람 모르드개의 명성이 각 지방에 퍼지더라

  5.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고

  6.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 명을 죽이고 진멸하고

  7. 또 바산다다와 달본과 아스바다와

  8. 보라다와 아달리야와 아리다다와

  9. 바마스다와 아리새와 아리대와 왜사다

  10. 곧 함므다다의 손자요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1. 그 날에 도성 수산에서 도륙한 자의 수효를 왕께 아뢰니

  12.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르되 유다인이 도성 수산에서 이미 오백 명을 죽이고 멸하고 또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니 왕의 다른 지방에서는 어떠하였겠느냐 이제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또한 시행하겠노라 하니

  13. 에스더가 이르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면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이 내일도 오늘 조서대로 행하게 하시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하니

  14.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조서를 수산에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매달리니라

  15. 아달월 십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

  16.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새벽 묵상

세계 역사학자들이 낸 통계에 보니까 지난 3000년 동안 지구상에는 약 3300여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과 옛 소련의 군비경쟁이 한창이었을 때 양국이 가진 핵탄두를 합치면 지구를 41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날마다 약 3만 5000여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증오심과 세력 확장을 위해 전 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무려 55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전쟁을 통하여 그 얼마나 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되고 있습니까? 부모를 잃은 고아들, 자녀를 잃은 부모의 한 맺힘, 신체 일부분을 잃은 장애인들의 고통, 심각한 전쟁의 후유증을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요??

예일 대학에 역사와 문명을 가르치는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이라고 하는 교수님이 쓴 "On the Origin of War"라고 하는 '전쟁의 기원' 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는 깊은 역사 연구 속에서 전쟁의 동기, 전쟁이 왜 있었느냐 하는 것을 총괄적으로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두렵기 때문에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이 넉넉하면 힘의 여유가 있으면 요사이 말로 초강대적 여유가 있으면 전쟁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큰 힘이 평화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죠. 이런 것을 심리적 전쟁동기론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대부분의 전쟁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인 것 같은데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와 혹은 자국에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 때문에 생기는 전쟁, 이것을 실리적 전쟁동기론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명예를 추구하는 명분적 전쟁 동기론이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2차 대전 때, 독일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죽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사람이 최고랍니다. 영국 사람들은 앵글로 색슨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승리자의 명예, 승리자의 영광, 개인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이런 것을 자랑하면서 소위 명분적 전쟁동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장 우리 가까이에 있는 부부싸움에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간에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돈 때문에 생겨난 싸움 아닙니까? 혹은 자존심 때문에 또는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싸움 아닌가요?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싸워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기를 원했던 대중들의 요구와 달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오히려 영혼을 구원하고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신 주님과 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가운데 싸울 싸움은 그냥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고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유대인을 멸절시키기 위해 계획된 하만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첫 번째 보내진 조서 때문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을 혐오하는 이들과의 전쟁에 대비한 두 번째 조서의 내용, 즉 유대인이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적을 막기 위한 전쟁의 이야기입니다. 다행히도 3절에 보니까 각 행정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을 돕게 되고 유대인들은 멸절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3절 “각 지방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과 총독들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므로 다 유다인을 도우니” 4절도 보십쇼.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하매 이 사람 모르드개의 명성이 각 지방에 퍼지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만 두 번째 치리자로 세워진 모르드개를 두려워하게 되면서 유대인을 혐오하는 적대감들이 다 그쳐지고 오히려 모르드개의 명성은 더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첫 번째로 1. 하나님은 반전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특별한 단어, 하나님이 반전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는데 1절 다시 보십쇼.“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유대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라는 문장을 보니까 하만을 따르며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유대인 멸망의 날이 도리어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이 되었다는 사실, 여기 “도리어” 라는 단어가 있는데 앞에 당연한 상황들을 완전히 360도 바꿀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더 기회가 되었다는 것, 가장 힘든 상황을 가장 좋은 상황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특징을 아주 잘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가장 두려운 유대인들에게 공포의 멸망의 날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대적들을 제거하는 승리의 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이렇게 도리어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삼손의 이야기 맨 마지막 사사기 16장에 보면 블레셋 방백들이 눈이 뽑힌 삼손을 데려다가 다곤 신상에서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려보라 힘빠진 삼손아 재주를 부리라고 놀리게 됩니다. 삼손이 마지막 기도하죠. 하나님 부르짖어 기도하오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기도하고 마지막 힘을 줄때에 그 집이 무너지고 이 순간에 삼손이 죽인 블레셋 지도자들이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대 반전의 하나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마지막 한 방으로 지난 수치와 모욕의 원수를 완전히 갚아버리시는 하나님. 여러분 설날이나 명절에 윷놀이 할 때 보면 대 반전의 역사가 나타나죠. 모도 나오고 윷도 나오고 하는데 다 이겼다고 생각하는데 딱 한번 빠꾸도가 나와서 꼴찌가 1등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그런 반전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 진 것 같아도 마지막에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 속에 있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말할 수 없는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도리어의 하나님 대 반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유다인이 대적들을 칠 때에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했다는 것에서 유다인은 영적 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5절부터 보면 유다인이 본격적으로 대적들을 쳤다는 실제적인 내용들이 나옵니다. 6절에 500명을 죽이고 진멸했다로부터 각 적들의 이름들, 쭉 나오다가 9절 맨 마지막에 특별한 표현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6절 맨 마지막 부분 여태까지 방어하며 죽인 대적들의 수를 보니 7만 5000명이나 되었는데 역시 맨 끝 문장은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여러분 보통 전쟁을 하면 적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전쟁하며 잃어버린 물자들을 다시 충전하기 위해 빼앗은 물품들을 당연히 국고로 압수해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인들은 75000명이나 죽인 대적들의 재산을 그 재산이 어마어마했을 텐데 몰수하지 않았는가? 이 일이 세상적인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의 전쟁의 목적은 일반적인 소유와 획득, 약육강식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 상반된 전쟁이 삼상 15장 4-9절에 나오는 사울과 아말렉과의 전쟁이죠. 하나님은 한 번 실수한 사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죽이라 말씀하십니다. 사울왕이 어떻게 합니까? 좋은 양과 소를 살려 가지고 오고 아각왕도 살려가지고 옵니다. 내가 다 죽였으나 하나님께 제사할 좋은 양과 소는 살려가지고 왔나이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소유와 획득 그들의 재산을 취한 사울, 불순종한 사울왕에게 사무엘은 대답합니다. 왕이여 제사보다 순종이 낫습니다. 이 도대체 무슨 행동입니까? 하나님께서 왕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죽이라.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 재물 취하라고 하라고 하신 전쟁, 재산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소유와 땅의 것들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의 주역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이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 마귀 권세 힘써 싸워 깨쳐 버리고 죽을 영혼 살릴 것 일세.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싸우는 자 되지 마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승리를 위한 전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악의 근원을 뿌리 뽑는 단호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3절을 그냥 읽어보면 에스더 참 무시무시하다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도 나무에 달게 했을까? 13절 보십쇼. “에스더가 이르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면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이 내일도 오늘 조서대로 행하게 하시고” 즉 에스더는 13일 말고 하루 더 14일까지 두 번째 조서를 행할 수 있도록 왕께 간청합니다. 그 다음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하니” 이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해 달라고 하루를 더 청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을 뿌리 뽑는 단호함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시는 하만과 같은 자가 나타나 권력을 이용해 한 민족 전체를 멸하고자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능성을 없애 버리는 행동이었습니다. 에스라 10장에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이방 아내와 결혼한 자는 그 아내와 그 아이까지 한명도 남기지 않고 다 내보내라 명한 내용이 나옵니다. 좀 잔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방 공주로 인하여 결국 우상의 산당까지 지어준 솔로몬을 생각해 보면 잔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는데 철저하시기 바랍니다. 에누리를 남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대 반전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정치적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강도가 달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충격인데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은 더 큰 반전의 역사였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반전에 반전을 이루시는 영적 승리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고 승리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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