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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지 않고

새벽예배 2023.07.03 | 사도행전 7장 1-16절 | 이선기 목사




사도행전 7장 1-16절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새벽 묵상

여러분 내일은 무슨 날입니까? 예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죠. 그래도 여러분은 조금 괜찮으신 똑똑하신 분들입니다. 아이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내일이 무슨 날이니? 물어보면 의외로 이렇게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몰라요. 혹은 쉬는 날이요, 할리데이요. 음... 밤에 폭죽 터뜨리는 날이요. 7월 4일 독립기념일은 사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이 아닙니다. 미국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승인된 파리조약이 체결된 날은 1783년 9월 3일이고 조약이 발효된 날은 1784년 5월 12일입니다. 대륙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독립을 결의한 날짜는 정확히 1776년 7월 2일입니다. 그런데 이 독립 결의를 대중에게 알리는 문건인 미국 독립선언서는 몇 부분을 고치느라 독립결의와 동시에 채택되지 못하고 이틀 후인 7월 4일에 채택되어 발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7월 4일은 무슨 날인가? 미국 독립 선언서가 발표된 날이다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날이든지 그 날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것은 참 아쉬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 의미를 정확히 전하지 못해서 그런지, 사업가들의 사업 욕심 때문인지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혀를 차게 만들고 실망스럽게 만드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성탄절, 많이 들으셨겠지만 성탄절은 산타클로스 데이가 아닙니다. 이 땅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의 탄생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소망 없는 우리가 죽음으로 끝날 운명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구원받을 길이 열린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이 자꾸 산타클로스의 생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누구였는지도 모르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께 드리는 감사의 선물이 아니라 내가 선물 받는 날로 엉뚱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 여러분 이런 것을 예민하게 보시고 그 날의 의미가 살도록 하나하나 바꿔 가셔야 합니다. 주인공인 우리 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철저히 드러내는 주의 구원의 도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렇게 주인공이 빠져버린 성전 건물을 붙들고 고수하는 이들을 향해 참 성전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있는 스데반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여러분 스데반 하면 그저 돌에 맞고 순교한 집사님 정도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있는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스데반은 목회자도 아니었는데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아는 대로 삶 속에 실천한 사도“행”전의 사람, 행함이 있는 삶을 살아낸 신실한 신앙의 모델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교회에서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입니다. 주일에 일주일에 딱 한번만 주일 예배 참석하고 오늘 좋은 말씀 들었다. 끝. 내가 스스로 보기에 이 정도면 크리스천이지 하시는 분이 있는데 하나님이 과연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똑같이 나를 괜찮게 생각하실까요?

핸드폰을 생각해 보십시오. 핸드폰이 충전이 다 되었으면 끝입니까? 충전기를 떠나 열심히 전화 통화도 하고 문자도 나누고 인터넷 검색도 해야 그래야 핸드폰을 핸드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일에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며 영적으로 충전되었으면 이제 세상에 나가서 잘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지음 받은 존재답게 잘 쓰여져야 합니다. 많이 쓰면 비록 닳고 떨어지기도 하고 기스도 나지만 주인이 보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영광의 면류관 씌워주실 그 날까지 잘 쓰임받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잘 쓰임받는 살아있는 주의 자녀 되시길 바랍니다.

1절 보십쇼.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여기서 “이것이”는 무엇일까요? 앞에 6장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까 회당에서 사람들이 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하게 됩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골수 유대인들 예루살렘 성전에 갈 수 없어 각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여 성경 읽고 연구하고 예배드리던 곳이 회당이었으니 다들 얼마나 성경에 대해 박식했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성경 전문가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 앞에서 그만 말문이 턱 막혀버렸습니다.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말로 스데반을 올가미 씌웁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 6장 13절에 보면 거짓 증인들을 세워 이 사람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 즉 나사렛 예수가 이 곳 성전을 헐고 또 율법을 고치겠다고 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래서 오늘 1절에 대제사장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우리는 여기서 첫 번째로 1.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껍데기가 무엇인지 알맹이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회당에 집중하는 이들, 골수 유대인들,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까지 전부 다 지금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붙들고 있었는가? 성전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상징이었는데 정말 그 안에만 계신 것처럼 우상화 되었던 성전 건물, 건물의 본질이 아니라 건물 자체를 애지중지 중요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이곳을 헐라고 했다는 비난이 나왔을까요?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성전 자체를 더 중시여기고 있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면서 요한복음 2장 19-21절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세우리라” 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성전이 되는 것이다. 하는 의미와 내가 죽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리라 하시는 의미로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주위에도 이런 교회가 꽤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이 땅을 위한 영혼 구원의 도구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 건물이 주는 이익 때문에 건물에 치우친 교회들, 무엇이 껍데기인지 무엇이 알맹이인지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613가지나 되는 이건 하라. 이건 하지 말라의 그냥 다 기억하기도 힘든 율법들, 너도 나도 다 지키기 힘든 율법들의 진짜 본질은 모세가 받은 십계명으로 하나님이 사랑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듬뿍 담겨 있는 그 본질을 놓친 율법들, 왜 그런 껍데기가 본질보다 더 중요시 여겨지고 있는가? 탄식했던 스데반은 1절에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하고 물을 때 성전과 율법의 본질을 알기에 답답한 마음으로 대제사장과 자기를 둘러싼 모든 이들을 바라보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고 이상한 것은 2절부터 스데반이 53절까지 무려 오십이절이나 되는 긴 이야기를 하는데 대제사장과 골수 유대인들이 스데반이 말하는 중간에 끼어들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거짓 증인 때문에 곤경에 처한 스데반이 이것이 사실이냐 하는 질문에 답을 하는데 바로 맞다 아니다 답하지도 않고 생각보다 꽤나 길게 답을 하고 있는데 스데반 때문에 화난 이들이 왜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을까요? 금방이라도 잡아 죽이자 하는 이들이 왜 잠잠하고 기다리게 되었을까요?

2절에 그 이유가 발견됩니다. 2절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바로 여기 부형들이여, 학자들은 이 부형들이여 때문에 스데반의 말을 듣는 이들이 스데반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고 추정합니다. “부형들이여”는 헬라어로 “아델포이 카이 파테레스” 아델포스는 형제들, 파테레스는 아버지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형제들아. 그리고 아버님들 들으십시오 라고 친근함과 존경함을 표현하면서 스데반이 부드럽게 대답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나를 공격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일지라도 2.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는 말입니다.

결국 뒤에 59절에 스데반의 말을 들은 이들이 마음에 찔려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고 스데반은 순교하게 되었지만 그 전까지 차분히 스데반이 아브라함, 요셉, 모세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둘도 없는 최고의 복음의 정수를 담대히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시 부드러움, 온유와 겸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 주시며 내가 주와 선생 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합당하다, 겸손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화냄과 분노와 증오와 미움과 질책으로 듣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마시고 온유와 겸손과 섬김으로 복음의 전달자가 되시기를 세상을 변혁시키는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요셉을 예로 들면서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건지심이 성전의 본질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마음이 누그러진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2절 다시 보십쇼.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다음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여기서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당신들이나 나나 똑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고 공감하게 하는 설득력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 다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메소보다미아에서입니다. 즉 갈대아 우르에서입니다. 거기서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주제가 뭡니까? 성전입니다. 성전을 설명하는데 출발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셔서 4절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이는 곧 5절 끝부분에 나오는 “약속하셨으며”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서 약속하셨기에 아브라함은 있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떠나 하란으로 갔습니다. 거기서도 또 떠나 왜죠? 예 약속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땅으로 갔습니다. 이게 곧 성전의 본질입니다. 즉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주신 약속 붙들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는 것, 즉 머무는 곳이 아니라 어디에 집착하거나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에 어디든지 집착을 버리고 순종하여 약속 믿고 가는 것, 그게 성전의 본질입니다. 왜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갇혀계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속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그럼 요셉은 왜 예로 들었는가? 하나님이 더 큰 계획이 있으셔서 흉년의 날을 대비하여 모든 이스라엘을 건지시고자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즉 하나님은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성전은 하나님이 성전을 통해 건지시는 것, 구원하심을 의미합니다. 그게 성전의 본질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붙들고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고 떠나는 순종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것 구원해 내시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거기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으로 끝난 줄 알았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천사가 뭐라고 표현합니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가 곧 성전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특별한 장소, 눈에 보이기에 거룩할 것 같은 그런 건물은 그저 돌무덤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보내 주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거기가 참 성전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건지심,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는 살아있는 교회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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