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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별 주관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2.10.22 | 창세기 38장 12-30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38장 12-30절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24.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새벽 묵상


일본 동경에 19세 된 소녀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처녀는 독실한 신자였는데 그 아버지는 강도질을 하는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처녀는 시간 있는 대로 아버지에게 전도하며 예수 믿으면 죄를 다 용서 받을 수 있다고 권면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후 수단으로 결심을 하고 유서를 써서 호주머니에 넣고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칼을 가슴에 품고 나가는 것을 알고 뒤를 따라갔습니다. 시부야 공원으로 가서 아버지가 숲 속에 숨은 것을 보고 변장하고 가방에 유서를 집어넣고 보자기를 쓰고 아버지가 숨어 있는 앞을 구두소리를 내면서 지나갔습니다. 숨어있던 강도인 아버지는 여자를 찌르고 가방을 낚아채 가지고 도망쳤습니다. 집에 와서 가방을 뒤져보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딸의 유서장이었습니다. 자기가 칼로 찌른 사람이 딸인 것을 깨닫고 통곡하면서 유서를 읽어내려갔습니다.


“아버지 이 불효한 여식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오늘 밤 아버지가 죽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모시는 길은 이 길 밖에 없는 줄 알기에 이렇게 했습니다. 남의 자식을 죽이면 그 부모가 가슴에 묻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아버지는 모르고 계시지요? 저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기에 최후로 이 길을 택하였사오니 저를 자식으로 여기시거든 불쌍하다 마시고 회개하시고 꼭 예수 믿으시고 천국에서 기쁜 얼굴로 만나뵈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안녕히”


이 유서를 읽은 아버지 강도는 입술을 깨물고 통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지를 움켜쥐고 경찰서로 뛰어가 ‘그 동안 강력 범죄를 저지른 놈이 바로 나입니다’ 하고 딸의 사연과 같이 자수를 하게 됩니다. 이 아버지는 비록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회개하면서 20년간 복역하고 모범수로 세상에 나와 예수를 잘 믿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회개만큼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회개가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직 신앙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진심어린 회개와 함께 신앙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시고 다시 뜨겁게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창세기 38장 1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읽으셨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 이야기가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던 유다의 회개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창세기 38장은 목사님들이 잘 설교하지 않는 장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민망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들 은혜 안 되는 유다의 가정사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잘 읽어보시면 아멘 할 부분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 없어도 되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앞에 창세기 37장을 끝내고 38장은 skip하고 39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없어도 되는 이야기, 없으면 더 은혜로울 것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38장 한 장에 길게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을까요? 유다도 사실 처음부터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 안 되는 사람을 철저히 변화시키셔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음에 이 유다를 통해서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 유다의 계보에서 메시야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사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원래 자격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고 용서받아서 영원한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된 것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제에 이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12절 보십쇼.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하고 되어 있는데 이 얼마 후에는 앞에 무슨 일이 있은 다음에 라는 뜻이죠. 앞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다가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그 죄책감에 휩싸여 형제들로부터 떠나 가나안에 와서 홧김에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그냥 결혼해 버렸습니다. 세 아들을 낳았는데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았습니다. 셀라를 낳을 때에 딴 곳에 가 있을 정도로 참 관심도 없고 책임도 없는 아버지가 바로 유다였습니다. 아들들이 성장하고 첫 아들 엘을 위하여 다말이라고 하는 며느리를 데려왔는데 엘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그냥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계대결혼의 규례대로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에게 들어가 후사를 이어야 하는데 후사가 나오면 자기가 아니라 그 후사가 재산을 독차지할 것을 알고 잔머리를 굴렸더니 하나님이 오난도 죽이십니다. 막내 셀라는 아직 어려서 유다가 다말에게 남편으로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정에 아버지에게 가 있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진심이 아니라 셋째 아들까지도 잃을 수 없다는 욕심에서 나온 계획으로 모든 탓을 며느리 다말에게 돌리는 참 어리석은 마음에서 나온 권유였습니다. 바로 이런 일이 있는 얼마 후에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아무 의미없는 결혼이었기에 그 죽은 결혼 상대자의 이름도 없습니다. 그냥 수아라는 사람의 딸이었습니다. 그 딸이 죽은 다음에 12절 끝에 보니까 친구와 함께 딤나에 가서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절 이 소식이 셀라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다말에게 들립니다. 다말은 과부 옷을 잠시 벗고 얼굴을 가리고 시아버지 근처에 가게 됩니다. 15절에 보니까 유다가 이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 여기고 잠자리를 청하게 되고 잠자리 후에 유다가 얼굴을 가린 이 다말에게 염소새끼를 주겠다고 하니까 다말은 담보물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뭘 줍니까? 유다가 자기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줍니다.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담보물이죠. 얼마 후에 유다는 이 여인을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되고 23절 그냥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면서 돌아서게 됩니다. 24절 석달이 지났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유다가 듣습니다. 유다는 화가 나서 욕부터 했겠죠. 욕하면서 24절 끝에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자초지종도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바로 불사르라고 합니다. 25절에 다말은 끌려나오면서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게 되죠. 도장, 끈, 지팡이를 보십시오. 유다가 이걸 보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고백합니다. 26절 “그는 나보다 옳도다” 당연히 주어야 할 셀라를 주지 않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대를 이은 다말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유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쌍둥이가 바로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참 파란만장하고 민망한 가정 이야기 아닙니까? 문제는 그 누구에게도 은혜스러운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1. 첫 번째로 이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은 바로 유다에게 있었다는 사실, 유다는 자기의 상처를 빨리 극복하고 비극이 번져가는 것을 초반에 막았어야 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유다는 동생 요셉이 자기 때문에 애굽에 팔려갔다. 요셉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가나안 사람을 사귀고 결혼도 홧김에 대충 아무나 하고, 자식에게도 큰 관심이 없이 그냥 대충 될대로 되라 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조금만 더 빨리 정신 차렸으면 이렇게 아들들이 죽고 며느리도 고통 당하고 민망하게 창녀연기를 해서 시아버지와 잠자리를 가지는 한국영화 올드보이 같은 비극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앞에 유다보다 먼저 야곱도 벧엘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맘대로 그저 돈만 눈에 보여서 잃은 돈을 회복하자 하면서 세겜 성읍에 갔다고 했습니다. 10년 정도는 괜찮았지만 딸 디나가 강간당하고 세겜과 그 아비가 협상하자고 오고 다 할례받으라 요구했더니 세겜 남자들이 할례받게 되었고 시므온과 레위가 가서 남자들이란 남자는 다 죽이고 재산 몰수하고 아내와 자녀들까지 끌고오는 그런 대 살해극을 겪게 됩니다. 원인은 바로 야곱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원인이 항상 나에게 있는지 돌아보는 것,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23절에 창녀 찾아서 도장 끈 지팡이 찾으려다가 못찾아서 했던 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지금 유다는 이미 부끄러운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24절에 행음한 며느리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명하는데 여러분 진짜 끌어내어 불살라 마땅한 사람은 바로 유다 자신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네 자신을 돌아보는 것, 이게 중요합니다. 빌립보서 2장 4절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순서가 다른 사람들의 일이 먼저가 아니라 자기 일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저는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명대사가 꼭 하나님의 음성 같습니다. 명대사가 뭡니까? “너나 잘하세요!” 다른 사람 판단하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 먼저 살피는 것, 교회에서도 이게 참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 일하는 것 보고 판단하기 전에 나는 어떤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아무개가 왜 앞에 나와서 저러나? 아니 저 집사는 왜 저래? 저 권사는 혼자 잘났어 정말. 여러분 혹시 이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판단하고 비판만 하는 사람이 혹시 저와 여러분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회개는 내가 얼마나 잘못된 존재인지 깨닫는 것이고 행동이 바뀌는 것이 진짜 회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6절 유다가 자기 물건들을 알아보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 고백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존재인지, 며느리가 아니라 바로 내가 죄인이구나. 이 고백이 바로 참 회개의 고백입니다. 죄인 세리의 기도처럼 고개도 못들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게 회개입니다. 다윗이 회개했던 시편 51편을 기억하십시오. 미쩨레레라고 하는데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찬양만 그렇게 하지 마시고 정말 진심으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1907년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중심은 바로 회개였습니다. 길선주 장로님이 친구에게 줄 된 가로챈 돈 안준 일을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회개한 일 그게 부흥의 불씨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 줄 깨달았으면 이제는 행동이 바뀌어야 진짜 회개입니다. 이게 더 중요합니다. 26절 “그는 나보다 옳도다” 말하고 유다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 다음 문장 보십쇼.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내 행동의 잘못됨을 깨닫고 자기의 행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개에서 회 자보다 개 자가 더 중요합니다. 돌아서는 것보다 고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가롯유다는 선생님 은 30에 팔아버린 것 후회는 했습니다. 돌아서는 것은 되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개가 잘못됩니다. 고쳐야 하는데 하나님이 가롯유다를 고치실 가능성까지 싹 다 없애버립니다. 열심히 주일 예배, 모든 예배를 통해서 은혜 받았으면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장으로 돌아가서 행동이 바뀌고 말이 바뀌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꼭 행동이 바뀌시길 바랍니다. 참 회개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이렇게 유다가 회개하니까 하나님께서 유다를 회복시키시고 복을 주십니다. 29절에 둘째인 베레스를 예수님 족보에 들어가는 인물이 되게 하십니다. 다말도 여인으로서 예수님 족보에 들어간 4명 중에 한명이 됩니다. 여러분,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다말과 베레스처럼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들어간 사실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감격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그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 나팔소리와 함께 불려질 나의 이름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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