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별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2.07.09 | 고린도후서 1장 23절 - 2장 11절 | 구진모 목사



고린도후서 1장 23-24절


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린도후서 2장 1-11절


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새벽 묵상


고린도 교회는 참 많은 문제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편지를 보내서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 바울의 편지를 받고, 어떤 교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들은 “자기가 뭔데,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 해” 하면서 불만을 갖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 까 염려함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본 바울이 도리어 근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바울만 근심하게 된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그들 때문에 근심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5절이 그 말씀입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근심은 바울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다 함께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만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만큼 믿음이 성장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근심은 단순한 근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는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보다는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더 근심을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래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인 고통은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 불순종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여러가지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서로 교회 안에서 미워하게 되고 다툼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경우의 해결책에 대해서 6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에게 벌받았으니 그것 잘 되었다" 라는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불순종한 사람들이 그 죄로 많은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스스로 죄책감과 수치심과 소외감같은 고통을 느꼈으니, 그것으로 이미 그들이 범한 죄에 상당하는 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더 이상 죄인시 하거나 소외시켜서 고통을 더 주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7절에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해결책은 불순종한 그 사람들을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겁니다. 



용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으로 하는 겁니다. 만약 어떤 잘못을 한 사람에게 말로 용서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오히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는 얼마나 잘했다고, 그리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용서한다고 말하나?”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마음 속으로만 하고 말로는 가서 그를 위로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것은 다 잘해도 이것은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겁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 내게 손해를 끼친 사람,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순종하는 겁니다. 



바울은 10절에 용서의 더 본질적인 역할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10절에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한 교인을 용서하면 바울도 그들을 용서하겠다는 겁니다. 사실 바울은 이미 그들을 다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면 바울 혼자 용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너희가 용서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사탄에게 속는 겁니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그 죄를 정죄하는 것이 바로 사탄에게 속는 일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을 범한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그를 멀리하는 것이 의롭고 선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를 갈등하게 하고, 나누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것 못지 않게 교회를 파괴하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있어 죄의 기준이 성경이 아니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난하고 험담하고 정죄한다고 죄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기준을 선택하여야 합니까? 성경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겁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때에 마귀에게 속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이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더 당하고 있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나입니다.  이미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자유한데, 하나님이 용서한 그 사람을 내가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나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정죄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요, 푸는 것은 용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풀면 주님도 풀 것이고, 우리를 은혜의 은혜의 통로로, 축복의 통로로 인도해 주신다는 겁니다. 



용서하기를 힘쓰십시오. 용납하십시오.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죽이고 자아가 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해야합니다. 그것이 나도 살고 교회 공동체도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용서라는 단어를 교회만큼 많이 말하는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사랑과 용서의 실천이 교회만큼 인색한 곳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심하게 욕하고 싸우다가도 술한잔 같이 하면서 해결하고 말짱하게 새롭게 이어나가는데,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틀어지면 그 다음에는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서로 쳐다보지도 않든지, 아니면 교회를 갈라서는 겁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딱 하나입니다. 사단의 속임수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열심인 사람을 넘어뜨리기를 좋아합니다. 믿음이 크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넘어뜨리고 속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단은 하나님을 근심시켜드리기를 원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더욱 기도에 힘쓰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