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2.07.15 | 고린도후서 5장 1-10절 | 구진모 목사



고린도후서 5장 1-10절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새벽 묵상


일하는 자에게 있어서 기쁨은 '쉬는 것'입니다. '쉴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일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풍랑을 만난 어부에게 있어서 기쁨은 무사히 항구에 정박하는 겁니다. 무서운 풍랑이 불어도 항구에 정박할 것을 바라보는 자는 능히 풍랑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그 목적이 있고, 목적을 이루었을 때 기쁨이 있는 겁니다. 



인생의 목적지는 어떤면에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수고와 고생이 끝나는 것이며, 영원한 안식과 평강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는 것보다는 육체를 떠나 죽는 것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생각이거나 또는 세상에서의 삶이 전혀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체를 떠나면 땅 속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약속된 천국에서 평안히 거하게 됨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9절에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함쓰노라”고 했습니다. 즉,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가?를 고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게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오래살까?”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될까?” 이런 믿음의 생각을 먼저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행동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디로 가야할 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약속의 땅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했을 때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셨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중풍병에 걸린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니 제발 고쳐달라고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겁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믿음의 말 하기를 원하시고, 이를 기뻐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안돼, 나는 못해, 나는 할 수 없어” 이런 부정적인 말들은 버려야 합니다. 비록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 죽음앞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은, 사랑을 가지고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처럼(고전13:1)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희생과 헌신과, 땀과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죄인들과도 한 상에서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셨고,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는 영원한 양식으로 풍족하게 채워주셨고,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병든 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피와 땀과 눈물의 수고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이런 커다란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속에는 주님이 흘리신 땀과 보혈의 피가 우리 속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헛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이웃과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를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예비된 천국잔치에서 상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사는 것 죽는 것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한 것은, 그의 소망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둔 자는, 죽음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조차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소망은 죽음보다 강한 겁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죄인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참고 인내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둔 자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예수님께 두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인내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가정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어서, 올 한 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