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WUMC_Logo_W-1_091121 copy.png

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2.06.02 | 고린도전서 14장 13-25절 | 구진모 목사



고린도전서 14장 13-25절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새벽 묵상


고린도교회에 방언하는 문제로 시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문제를 잘 설명을 해 줍니다. 



방언을 말 할 때 그 첫째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임했던 방언입니다. 사도행전 2: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다른 언어들로 말했다”고 했습니다.행2:7-8을 보면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고 했습니다. 이 때의 방언은 초자연적인 은사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언의 은사는 계속해서 초대교회의 고넬료의 집에서도(행10:46), 또 에베소에서 바울이 안수할 때 (행19:6) 방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서도 이 방언의 은사는 계속되었던 겁니다. 실제로 바울도 방언을 했습니다. 고전14:18절을 보면,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방언하는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워졌다는 겁니다. 방언을 해야 하느냐, 안해도 된다는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워졌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교회에 덕이 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방언의 문제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사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의 여러가지 은사중 하나입니다. 고전12:28절 끝부분을 보면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은사중 하나라는 겁니다. 



오늘 사도행전 14:2절을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그랬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도 보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방언은 하나님과 나와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방언을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전14:4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14:12절에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의 은사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나님과의 깊은 내면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6-27절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또박또박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가끔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직접 기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지성과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방법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존 낙스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진지하고 친밀한 대화다”고 했습니다. 존 칼빈은 “기도는 하나님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교제이다”고 했습니다. 



묵상이 말이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라면 기도는 말이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마음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삼상 1-13). 그는 비록 소리는 내지 않고 기도했지만 그것은 말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오늘 바울이 강조해 주는 기도는 아무런 뜻도 모르고 중언부언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12:1절의 기도를 보십시오. “우리는 예레미아의 기도에서 대화로서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입니다. 결국 나중에 가서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즉, 기도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들으려 하는 데서 시작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롬 8:26) 토마스 아켐퍼스는,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기술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인간적인 기술이 아니고 우리의 내적 존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탄식과 곤핍을 말로 나타낼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기도 생활에 고정된 규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특별히 제시하는 기도의 시간은 하루 중 아침·낮·저녁입니다.



기도의 때와 시간에 대해 시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88:13절에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또 시편55:17절을 보면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 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예루살렘 쪽으로 나있는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단 6:10) 예수님은 해질 무렵에 홀로 빈들에 가셔서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기도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주로 아침 기도를 권장합니다.



기도에는 기다림과 끈질긴 씨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몇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나름대로 결론을 가지고 그것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자기 주장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문제 그대로를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객관식 시험 답안지 작성과 같이 O,X가 아닙니다. 최선의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박국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자기 시대에서 생긴 역사적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긴 대화 끝에 그가 얻은 해답은 하나님 자신만으로 다 되었다는 겁니다.



하박국3:17-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