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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2.05.18 | 고린도전서 9장 1-12절 | 구진모 목사



고린도전서 9장 1-12절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새벽 묵상


어제는 고린도전서 8장을 공부하면서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우상에게 올려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권면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믿음이 강한 자신의 자유로운 행동이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면 안되니까 절제하는 것이 믿음이 강한 자의 태도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유익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복음 인생의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즉, 자기의 권리가 있지만 복음과 영혼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것을 포기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권리라는 단어에 익숙한 시대입니다. 요즘 세상이 무척 불안한데, 그 이유가 뭡니까?  개인이나, 단체나, 민족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투쟁들, 전쟁들이 왜 일어 납니까? 자신들의 권리를 찾겠다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자기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유인이면서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할 뿐만 아니라, 사도라고 주장하는 바울을 비난하고 공격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사도는 4가지 자격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았어야 하고, 둘째는 공생애 3년 동안 생활을 함께 한 사람이어야 하고, 셋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특별한 권능을 행할 능력을 주었기 때문에 기적을 베풀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에 보면,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기에 가장 큰 걸림돌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이방인을 구원할 전도자로 불러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니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것은 바울의 사역 중에서 굉장히 큰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복음 증거하는 것도 힘든데, 자기가 전도해서 세운 교회마저도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 상당히 마음이 섭섭하기도 했고,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 4절에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도 복음을 증거 하다가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다른 사도들 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권리가 있고,  6절에는 전도를 위해서 생업을 갖지 않을 권리가 있고, 9:14절을 보면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 12절에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 이 권리를 절제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증거자로 부르신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쓰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순간적인 육신의 유익 때문에 섣불리 결단을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신앙 생활하면서 걸림돌이 어디서 나옵니까? 물질(헌금), 인간관계(말할 필요도 없이 많습니다), 말 한마디에 시험을 당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힘을 다 잃어버렸습니까? 



어느 종교단체의 테러범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생명을 드립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 보면 참 불쌍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자신의 신을 위해서 죽겠다는 정신은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열정과 충성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 전파에 조금이라도 장애가 된다면, 자기의 권리마저 과감히 버리는, 희생적인 사도의 사명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바울에게는 기쁨으로 여겨졌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바울은 “범사에 참는다”고 했습니다. '참는'다는 말은 '덮다', '감추다', '참다'의 뜻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면, 바울은 온갖 종류의 고난을 인내로써 참았습니다. 이유는 12절 끝 부분을 보면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예를들어서 바울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일을 담당한 자가 물질에 얽매여 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이 실족하지 않고 신앙 생활을 잘 하도록, 바울 스스로 모든 권리를 포기했던 겁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4:2에서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기도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조 코치로서 ‘벨라 카롤리’가 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의 체조 코치로 유명한 ‘코마네치’를 길러낸 사람입니다. 나중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휴스턴에서 미국의 체조 선수 300명을 길러 냈습니다. 그는 선수들을 연습시킬 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평안을 포기하고 코치의 훈련 방향에 순종할 것, 둘째는 생활의 우선순위 중 체조를 1위에 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체조에 헌신할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훌륭한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평안을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는 희생적인 절제 생활의 훈련이 필요하고, 삶의 우선 순위를 항상 복음 전파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복음으로 값없이 구원(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으로 인하여 값없이 구원함을 받았기에 이 복음이 또 우리를 통하여 값없이 남에게 전해져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광이자 사명입니다. 또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이루는 겁니다. 한 마디로 믿는 자들에게 복음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겁니다. 



여러분, 복음이 값없이 구원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우리도 값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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