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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07.06 | 사도행전 8장 2-13절 | 구진모 목사




사도행전 8장 2-13절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새벽 묵상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아주 심각한 대화의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어떤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인생의 불행중에 가장 큰 불행은 실명하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소경 되었다는 것은, 이 보다 더 불행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됐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 소경을 제자들이 보고는 주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 또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죄 입니까?” 심각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우리는 이 질문과 대답 속에서 세 가지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하는 질문은 도덕적 질문입니다. 즉, 도덕적 원인으로 인해서 이 사람이 불행해진 겁니까? 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람이 이렇게 불행한 생을 살게 됐다”는 겁니다.


두번째로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는 말은, 원인을 과거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과거에 본인이 죄를 지었고, 또 과거에 부모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불행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 두려는 겁니다. 우리도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불행은 어제 때문이요. 어제의 불행은 더 좀 더 과거 때문이요. 그래서 설명이 다 안되면 전생에 죄가 많아서, 여기까지 끌고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 즉 미래에 두었습니다. 과거가 원인이 아니고, 미래에 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미래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잠깐 눈이 어둡고 괴로운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은 미래 때문입니다. 공부하면서 만일에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나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말이 됩니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 오늘 이 고생을 하는 겁니다.


세 번째 의미는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건 인간차원에서 생각하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세상에서 해답을 얻으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무슨 생각이 듭니까? 내가, 하루하루 경험하는 사건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늘 ‘어떻게’만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어떻게 하면 피해 갈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이 일을 당해야 했나?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는 방법으로, “어느 놈이 죽일 놈이냐”고만 서로로 헐뜯다 보면 서로가 지치고, 마음에 견딜 수 없을 만큼 상처만 남게 되는 겁니다. 단지 이것뿐이지 그 원인은 오리무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람의 죄 때문이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미래에 어떤 일을 이루시려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은혜가 충만한 초대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한 다음에 모두가 은혜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잃어버렸던 용기를 얻어서,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랑을 실천함에도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 자기의 것을 팔아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 교회에 환난과 핍박이 왔습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흠뻑 주셔야하고 자손만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주셔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교회에 어려움이 왔습니다. 고난이 왔습니다.


그것도 보통 고난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하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 처럼 집에까지 찾아가서 끌어내서 남녀를 막론하고 감옥에 다 쳐 넣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 사람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완전히 망하고, 인생이 쑥대 밭 되었다”고 할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다 흩어져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흩어진다는 말은 집을 떠난다는 얘깁니다. 고향을 떠나고 안정된 사회를 떠나서 피난의 길을 나선 겁니다. 육이오 때 이런 피난생활 해보신 분들 계실겁니다. 아무 기약도 계획도 없이 그저 목숨 하나 살기 위해서 그냥 집을 떠나는 겁니다.


본문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원치 않는 고생스런 피난살이를 합니다. 위험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지방에서 낯선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그들에게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더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처음부터 두루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핍박과 환난때문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흩어졌다는 것은 강권적입니다. 피동적이고 원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원치 않은 엄청난 사건 앞에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된 겁니다. 이제 저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찾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큰 명령을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은혜 충만하고,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교제하고, 자기들끼리 너무 좋으니 복음 전할 생각을 안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흩으신 겁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 이런 생각 버리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돈 좋아하는 사람, 돈에 미친 사람, 그것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사람, 우월감 가지고 저 잘났다는 사람, 목에 힘주고 사는 사람, 사람 만들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만한 사람 겸손하게 만드는 거 참 힘듭니다. 예수를 믿어도 잘 안되요.


죄송한 말이지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손을 보셔야 고칩니다. 가끔 어떤 분이 “어느 집사님이 어떻고, 어느 장로님이 어떤데, 목사님 좀 만나서 충고 좀 해 주세요” 그럽니다. 물론 충고해서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가 말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 어디 앉아있는 겁니까? 그래서 큰 환난을 통해서 이방으로 내 쫓았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서 비로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때때로 우리도 전혀 모르고 고난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먼 훗날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것이 나를 향한 축복이었다고, 이것이 내게 주시는 새로운 기회였다고 비로소 깨달았던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당한 시련, 엄청난 사건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왜 이런 일이 일어 났느냐?”라고 물으십시오. 과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고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결코 낙심하지 말고, 그 때를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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