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3.06.30 | 사도행전 5장 17-42절 | 구진모 목사
사도행전 5장 17-42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새벽 묵상
창세기 29장에 보면 형제간의 불화로 고향집을 떠나 외삼촌 집에 도망와서 살던 야곱이 라헬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라반은 내 딸과 결혼하려면 7년 동안 온전히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내를 얻고자 하여 7년 동안 봉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표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창세기 29:20보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7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7년은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7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고 한 것은 사랑안에서는 아무리 큰 어려움도 7년이 며칠 처럼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대개 사람이 스트레스 받고 어려움에 처하면 하루도 수천 년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금식 기도 해보신 분은 잘 아실겁니다. 아침 한 끼를 금식 하더라도 왜 그렇게 점심때까지 긴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슨 오락을 한다든지, 재미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해 보십시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갔느냐면서 아쉬워 합니다.
이 시간 바라기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그렇게 기쁨과 축복의 시간으로 느껴지기를 축원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짧게 느껴지고, 어떤 사람은 길게 느껴집니다. 은혜받는 사람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상황에 따라서는 그런 환경이 기쁨과 축복이 될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이미 4장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40-41절에 보면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매로 때리고 채찍질하여 엄히 경계하여 또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위협하며 풀어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풀어 준 순간에 이 사도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끌려가서 심문당하고 두들겨 맞고 협박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기뻐하는 사도들의 모습은 보통 인간의 모습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들이 권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권능입니까? 바로 핍박을 받아도 이겨낼 수 있는 권능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즉, 주를 위해 박해와 환난을 당해도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힘, 이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를 위한 고난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핍박은 사람이 할지라도 그것을 조종하는 세력은 사탄의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원수가 핍박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사탄의 원수가 누굴까요? 사탄의 원수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마귀의 핍박을 받는 겁니다. 반대로 죽은 믿음은 핍박이 없습니다. 마귀의 공격 목표는 살아있는 신앙이지 죽어서 세상 물결에 흔들려 다니는 영혼이 아닙니다.
어떤 하인이 주인과 더불어서 사냥을 갔습니다. 주인이 활을 가지고 날아가는 꿩 한마리를 겨냥해서 쏘았습니다. 날아가던 꿩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꿩이 날아갑니다. 주인은 또 날아가는 꿩을 향하여 활을 겨눕니다. 그러자 하인이 물었습니다. “주인님 날아가는 꿩도 중요하지만 떨어진 꿩을 빨리 주어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주인이 하는말이 “그건 이미 죽은거야 내버려 두어도 그건 내 것이야 그러나 살아있는 저 것은 내버려 두면 내 것이 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계속 날아가는 꿩을 향하여 화살을 겨누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내게 핍박이 없다고 안심하기 전에 내 영혼이 살아있는지를 점검 해 보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살아있으면 사탄의 공격 목표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나를 핍박할지라도 사람이 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걸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사람이 핍박하는 것으로 보게 되면 그와 원수가 됩니다. 그 원수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사랑 못합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저 영혼을 조정하는 세력이 사탄이라고 생각이 되면 그 사람은 밉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핍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 들어가서 박해하고 핍박하게 하는 그 사탄의 세력을 미워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그러면 주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습니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됩니다. 사도행전 14:22절에 말합니다.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다 구원받았습니까? 모두가 다 아멘 할 겁니다. 맞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걸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그걸로 만약 끝난다면 지금 천국으로 직행해서 가야됩니다.
예수 믿는 순간에 세상 떠나서 천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믿는 순간 즉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예수믿고 나서부터 천국갈때까지 시간의 여유를 주셨습니다. 그 시간의 여유가 내가 예수 믿은 후에 살아가는 세상의 삶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 믿는것 까지는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믿은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이것은 거의 소홀히 생각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될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나를 믿으려거든 이라고 하지 않고, 따라오려거든 .... 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초보자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는데 까지는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라가는 일에는 관심을 거의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일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이 말은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자랑하면서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목숨을 하나님께 부탁해 놓고 산다면 죽는 것이 두렵겠습니까? 환난이 겁나겠습니까?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니까 두려운 겁니다.
여러분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불가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본능에 근거를 두고 삽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판단하고, 행동하다보니까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이 올 때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말씀처럼, 많은 환난과 고난이 있어도 예수이름 때문에 받는 것이라면 그 고난은 영광과 축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의 축복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 어떤 행복이,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 어떤 기쁨이 있는 겁니다. 사도들이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을 기뻐하고,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외치고 또 외친 것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이런 기쁨의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주님 주시는 참 기쁨을 맛보시면서 즐거움으로 신앙 생활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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