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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되지 말고 사랑 합시다

새벽예배 2022.05.31 | 고린도전서 13장 8-13절 | 이선기 목사



고린도전서 13장 8-13절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새벽 묵상


어느 귀족의 집에 바보 하인이 있었습니다. 귀족은 너무 미련한 하인을 쫓아내면서 지팡이 하나를 주고 말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갖고 나가거라. 다니다가 너보다 더 미련한 바보를 만나면 주어라 알겠느냐?” 바보 하인은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아도 자기보다 더한 바보가 없었습니다. 수년이 흐른 어느 날 바보 하인은 옛 주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비록 자기를 내쫓은 주인이지만 지난 날의 정이 생각나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주인님! 아주 많이 아프시군요” “그래, 나는 곧 떠나야 할 것 같다” “어디로 떠나시는데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거기가 어딘데요? 먼가요? 언제쯤 오시는데요?” “이 바보야! 세월이 흘러도 너는 여전히 바보구나. 이 세상을 떠난다는데 언제 오느냐고 묻다니. 나는 결코 돌아올 수 없어” “그럼 그 특별한 곳에 가시기 위해 특별히 뭔가를 좀 준비하셨나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아이고...정말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이 지팡이를 갖고 가세요. 전 단지 이 땅의 것만을 소홀히 했는데 주인님은 영원한 것을 소홀히 하셨네요 그러니까 이 지팡이를 다시 받으십시오"

이솝우화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자하나가 어느 동네길을 걸어가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처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눈에 반해버린 이 사자는 그 처녀의 뒤를 따라갔죠, 그 처녀는 그 동네 농부의 딸로 아름답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사자는 한눈에 사랑에 빠져 농부를 찾아가서 말합니다.

"나는 당신 딸을 사랑하니 결혼을 하겠소, 만약 싫다면 당신 딸을 잡아먹고 말겠소" 갑자기 사자의 청혼을 받은 농부는 앞이 캄캄했으나 사자가 무서워 거절하지 못하고 하루의 말미를 달라고 사정을 해서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걱정 때문에 그날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서 딸은 그 자초지종을 묻고는 괜찮으니까 내일 사자가 오거든 이렇게 저렇게 시키는 대로 하시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사자가 아침 일찍 찾아왔습니다. "생각해 봤소?"

사자가 큰 소리로 묻자 농부는 반색을 하며 사자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웃는 낯으로" 내 딸도 당신처럼 성실하고 용감한 사자라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네요. 다만 한 가지 걱정을 하더군요. 기분이 좋아진 사자는 침을 삼키며 물었습니다. "한 가지 걱정이라니" 농부는 머뭇거리다가 "저..말입니다. 내 딸도 당신을 좋아하는데 사자님의 그 날카로운 발톱이 무서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발톱을 뽑아주시면 시집을 가겠답니다."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농부의 딸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긴 사자는 자기의 발톱을 모조리 뽑고는 다음날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사자를 추켜세우며 말했습니다.

"내 딸은 사자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답니다. 그것만 들어주시면 기꺼이 시집을 가겠답니다." "오 그래? 그 부탁이 뭐요?" "실은 내 딸이 사자님의 그 날카로운 이빨이 무서워 가까이 갈 수가 없답니다." "알았소. 그럼 내일 다시 오겠소" 이미 발톱을 뽑아버린 사자는 뒤뚱거리며 물러갔습니다. 다음날 다시 왔습니다. "내 당신 말대로 이빨도 뽑았소, 자 이제 당신 딸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자 농부는 갑자기 몽둥이를 들더니 "네 이놈, 지금까지는 네 발톱과 이빨이 무서워 꼼짝 못했지만 이제는 무서울 게 없다." 하며 사자를 마구 두들겨 팼습니다. 사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쳤지만 이미 발톱도, 이빨도 다 뽑아버린 뒤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장 눈앞에 것만을 보고 판단하거나 행동에 옮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고 보이지 않지만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 새벽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멀리 보고 넓게 보시고 준비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말씀과 이어지는 부분으로 어제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더욱 큰 은사들 사도 선지자 교사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사랑, 그 사랑의 성격들을 잠깐 나누었습니다. 참는 것이 사랑이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사랑은 탁월하다. 즉 사랑의 영속성과 우수성을 역설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없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 은사가 최고다 저 은사가 더 우월하다 하고 분쟁이 이루어지자 그 모든 것들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불완전하다. 오직 사랑 외에는 다 세상의 종말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하면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바울. 8절 보십시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 바울의 메시지를 묵상하시면서 나의 지식 나의 은사는 다 불완전한 것임을 깨달으시고 완전한 사랑. 모든 사랑의 본질인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1. 첫 번째로 우리의 인간적 지식이나 은사들은 아주 어린아이와 같이 부분적이다.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9절 보십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에 보니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 즉 온전하신 주님의 재림이 있을 때에는 다 폐하게 된다 하셨습니다. 11절에 보니까 우리들이 가진 지식이 은사들이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아이가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처럼 유치하고 어리석은 모습 그 모습이 바로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은사가지고 다투고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 싸우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의 특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아주 감각적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것,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에 집착하고 그 감각적인 것에 맞추어 판단하고 행동하죠. 내가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 발에 못 자국 직접 만져보기 전에는 부활의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던 도마, 도마의 모습이 바로 감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찾아오셔서 직접 몸을 보여주시고 만지도록 내어주십니다. 도마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즉 그저 보이는 눈, 만져지는 감각적인 것이 있어야 나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이런 도마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 분 있습니까? 당장 눈으로 보여야만 손으로 만져져야만 믿는 분 있습니까? 도마의 옷, 의심의 옷을 벗어버리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또 하나 어린아이는 또한 굉장히 현세적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미래지향적인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당장 내 손에 주어진 돈 그냥 당장 필요한 욕구 해결하는데 허비해 버립니다. 미래 10분 뒤, 아니 내일을 위해 내년이나 몇 년 후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배고프면 그냥 울고 몸 아프면 울고 현실적 욕구가 채워지면 그제서야 웃는 아이들.

가나안 땅 정탐꾼 10명 중에 대부분의 정탐꾼 8명의 보고는 어땠습니까? 우리는 저들이 보기에 메뚜기 같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도 다 잊어버리고 당장 눈앞에 가나안인들의 모습에 압도되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지금 우리는 패배하고야 말 것이다. 당장 먹고 입고 사는 현실 문제에 집착하여 주님의 영화로운 언약의 땅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눈앞에 현실 문제에 급급하여 변절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태복음 10장 28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어려움 때문에 이 땅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놓치지 않는 소망 붙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은사들은 그저 희미하게 아는 것들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12절 보십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불완전한 지식은 거울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 표현합니다. 여러분 당시 고린도시에서 사용하는 거울은 지금과 같은 유리판 뒤에 수은의 아말감을 부착하여 만든 선명한 거울이 아니라 놋으로 주조한, 청동으로 만든 금속의 표면을 닦아서 광을 낸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은도 사용해서 만들었는데 문제는 무엇인가? 아무리 좋은 금속제 거울일지라도 그 보이는 형상이 희미했고 불명료했다는 사실.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은사 논쟁들은 다 희미한 것들일 뿐이다. 다시 12절 중간쯤에 “그때에는” 즉 주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다 분명하고 선명하고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분명하게 신약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계시해 주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전통과 관습에 젖어 불과 목자와 동방박사 정도만이 메시야의 초림을 기다리고 보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만물의 주의 신성을 드러내고 말씀이 분명히 재림하실 주님을 증거하지만 뿌옇고 희미한 옛날 놋으로 만든 거울과 같이 또 주님의 다시 오심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지식과 각종 은사들의 한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그토록 중요시하고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오히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림을 방해하고 더 뿌옇게 만드는 희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수많은 프로그램과 조직들이 오히려 주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그저 우리끼리 여기가 좋사오니 하게 만드는 것들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큰 교회 건물, 너무 좋은 시설들, 너무나 좋은 첨단 기기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준비하게 만드는 것들인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한권이 귀하고 악기도 없어서 박수만 손이 부서지라고 치면서 그저 울며 기도하고 밤을 새워 부르짖는 기도가 있을 때가 오히려 더 주님과 가까웠고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본질을 회복하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처음 절과 마지막 절에 그때, 주님 다시 올 때를 기다리는 자가 붙잡아야 할 것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8절 보십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절 보십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 항상 있을 것인데 최고의 것인 사랑, 여러분 영원한 사랑 붙드는 자,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까지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내가 이 땅을 하직해도 계속 기억하고 잊지 못할 변함없는 항상 있을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 붙드는 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갚을 수 없는 그 사랑 기억하고 붙들고 열심히 전하는 자 되시길 바랍니다. 그 때를 준비하는 자 되시길 바랍니다. 이 사랑 잊어버린 자가 바보입니다. 이 사랑 붙들고 바보 되지 말고 빚진 자로 사랑하는 지혜로운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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