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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모양은?

새벽예배 2023.11.22 | 잠언 21장 1-14절 | 이선기 목사




잠언 21장 1-14절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



새벽 묵상

이진우 님의 글 중에 마음의 모양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읽어드립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남긴 상형문자에 따르면 어린이의 마음은 세모, 어른의 마음은 동그라미입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픈 이유를, 세모꼴 양심이 죄를 짓는 만큼 회전하면서 뾰족한 모서리로 마음을 긁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모서리가 점점 닳아져 둥그렇게 변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잘못을 범해도 아픔을 별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어린이의 마음은 작은 일에도 아픔을 느낍니다. 순수하고 정직했던 젊은이가 나이가 들면서 양심의 가책을 잘 느끼지 않는 무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십시오. 당신 마음의 양심은 어떤 모양인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세모입니까? 동그라미입니까? 마태복음 18장 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아주 작은 일에도 마음의 아픔을 느낄 정도로 예민하고 순수한 양심이 깨끗하고 순전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라 하시는 주님의 의도적인 말씀입니다. 이태리의 문인 빠삐니는 말하기를 "오늘날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잠언 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셨는데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모양이 무뎌지지 않도록 마음을 잘 점검하시고 돌보시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여 순전한 마음으로 회복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잘못을 저질러도 마음이 아픈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어제까지 나누었던 잠언 20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주제로 여러 가지 교훈을 나누었습니다. 여러 가지 악행들을 삼가라. 포도주와 독주를 삼가라. 다툼을 피하고 게으르지 말라, 정직하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충성된 자로 사는 것이다. 말을 조심하라. 두루 다니며 한담하지 말라. 무엇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잠언 21장은 좀 더 깊이 들어가 우리 인간의 깊은 속마음, 내면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태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뎌졌던 우리의 속마음, 우리의 내면 회복운동이 일어나시고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첫사랑의 감격이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우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우리의 예배가 온전한지 살펴 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가운데 제사 자체보다도 그 속마음에 공의와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3절 보십쇼.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당장 눈앞에 아무리 최고의 제물로 번드르르하게 뻑적지근하게 온갖 최고의 것들로 예의를 갖추고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약방의 감초와 같은 그 마음, 예배자의 순전한 마음이 없으면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 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제사 드리기 직전에 가족이나 형제와 혹은 이웃과 크게 싸우고 마음 상한 상태로 괴로운 상태로 나와 있으면 그 상한 마음의 예배를 하나님이 어찌 받으시겠는가?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제로 하나 되어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시간인데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먼저 가서 화목하라 그 후에 와서 예배드리라.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그런 순전한 자의 예배, 삶이 곧 예배인 자의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실천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가 뭐였습니까? 가인은 그냥 밭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가인도 양의 첫 새끼처럼 밭의 소산 중에 마음을 온전히 담아드릴 수 있었다면 제물은 열랍되었을 것이고 결국 동생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자주 말씀드리지만 사울왕은 사무엘이 오기 전에 마음이 급해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대충 때우고 맙니다. 제사장 없이 자기가 훝딱 해치워 버립니다. 두 번째 기회를 주어 생명 있는 것은 다 죽이라 했는데도 또 아각과 양과 소를 살려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죠? 왕이여 제사보다 순종이 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를 점검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체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정말 마음을 드리는 예배인가? 혹시 예배드리기 전에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과 부모님께 싸우며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내가 준비하는 예물이 쓰다 남은 것은 아닌지, 내가 드리는 시간이 다른 것 다 하고 남은 시간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구별된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었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마음을 하나님 우선순위로 바꾸시고, 나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품으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 내면에 온전한 예배자의 모습을 갖추고 정성껏 진심으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2. 두 번째로 마음은 눈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 눈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지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4절 보십쇼.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우리 한국말에 노처녀 노총각에게 쓰는 말 중에 “너 너무 눈이 높은 것 아니야”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눈이 너무 높아서 눈 아래에 있는 것들은 쳐다도 안 본다. 신랑감, 신붓감 고르는 기준이 너무 높다. 하는 표현이죠. 오늘 본문의 저자도 비슷한 마음이었습니다. 눈이 너무 높아 웬만한 사람을 다 눈 아래로 깔아 보는 사람은 즉 교만한 사람이다. 4절 끝에 분명히 “다 죄니라”하는 엄중한 표현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간 이유는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느부갓네살이 얼마나 눈이 높고 교만한 자였으면 그냥 눈이 높은 것도 모자라 금으로 큰 신상, 그냥 눈보다 훨씬 높은 금신상의 눈을 만들었겠습니까? 바벨탑을 쌓는 이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 우리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하늘에 닿게 쌓자. 내 눈이 높아지는 것 내 마음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자 했기에 하나님은 언어를 다르게 만드시고 눈 높은 교만한 모든 자들을 온 지면에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사냥꾼들이 곰을 잡는 방법 중 하나는, 곰이 잘 다니는 길목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는답니다. 그러면 그곳을 지나던 곰이 돌덩이에 머리를 부딪히게 되는데, 머리를 부딪힌 곰은 자기가 가는 길을 막는 데 화가 나서 돌덩이에게 덤벼듭니다. 결국 줄에 매달려 있는 돌덩이와 자기 머리를 부딪쳐서 누가 센 지를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곰은 머리가 터져 녹초가 되고 기절한 곰, 사냥꾼들은 와서 곰을 끌고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냥 고개를 좀 숙이고 지나가면 될 것을 눈이 높아, 내가 누군데 하며, 엉뚱한 힘겨루기를 하는 곰처럼 교만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38편 6절에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하셨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일,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일,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지금 내가 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돈은 아주 긴밀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1절에 보면 주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십쇼.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좀 어수룩한 자들을 속여 모은 재물, 압박하여 수탈한 재물, 지위를 이용하여 수고나 노력없이 뇌물같은 부정으로 축적한 재물. 이런 재물로 아무리 좋은 양과 소를 사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한들 하나님이 어찌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헌금함에 소리가 철렁 날 정도로 많은 돈을 바치는 부자의 예물보다도 가난한 과부가 조용히 떨며 드린 두 렙돈을 가장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여러분 500원짜리 동전 기억하시나요? 엄마는 주일학교에 가는 7살짜리 아들에게 500원짜리 동전 두개를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는 하나님께 헌금하고 하나는 네 용돈으로 써라" 신이 난 아들은 부지런히 교회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교회에 거의 다 왔는데 길에서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손에 쥔 500원 짜리 동전 두 개 중 한 개가 또르르 굴러서 하수구 구멍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한탄하면서 외칩니다.

"이를 어쩌나... 하나님께 헌금할 500원이 하수구에 빠졌네. 어떡하면 좋아."

여러분 왜 언제나 하수구에 빠진 500원은 꼭 헌금할 돈이어야 할까요? 손에서 놓치지 않은 500원은 헌금이 될 수 없는 건가요? 고린도후서 9장 21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가 지금 즐겨 내고 있는지 내 마음을 점검하시면서 돈보다도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참 예배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속마음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 보고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마음을 다듬어, 둥그렇게 무뎌진 마음을 다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다듬어 가시며 양심이 다시 살아나고 예민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낮아지셔서 직접 몸을 드려 산 제물이 되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마음은 하나님과 죽을 수밖에 없던 운명인 우리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주님께 감사 또 감사하면서 추수감사의 기쁨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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