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새벽예배 2022.02.23 | 누가복음 15장 1-10절 | 이선기 목사



누가복음 15장 1-10절


1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절.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절.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절.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절.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절.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2월 23일 새벽 묵상


동네에서 망나니로 소문난 아들을 둔 어느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아들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다 챙겨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노심초사하며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옆집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자식 없는 샘 치시고 그만 잊어버리세요” 그 때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도 만약 그 아이가 당신의 아들이었다면 벌써 잊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내 아들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 표현이죠.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아데오다투스라는 사생아까지 낳을 정도로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아들일지라도 그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무려 30년을 눈물범벅이 되며 날마다 기도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간절했는지 이렇게 날마다 눈물로 간구하는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보고 모니카를 바라보며 했던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결국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드디어 모니카의 기도가 응답받는 그 날이 왔습니다. 386년 밀라노에서 아이들의 동요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급한 부르심을 받은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1-14절 말씀을 읽고서 회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기다리던 어머니 앞에 돌아오게 되고 고대 교회에 큰 획을 긋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어거스틴에게 영향 받은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요. 칼빈이요, 웨슬리 목사님이십니다.

이렇게 집나간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참고 끝까지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 포기하지 않는 그 간절한 마음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모든 어머니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은 어머니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우리를 포기할 수 없는 분이심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누가복음 15장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마음, 포기할 수 없는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시는지 한 영혼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는지 그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듣는 이들이 예수께서 누구시고 왜 오셨는지를 깨닫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런 마음 가득하여 하루하루를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 구령의 열정을 절대 버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선 1절과 2절을 보십쇼. 1절에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절과 2절이 너무 대조적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의 말씀에 집중하며 나아오는데, 가장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하고, 정말 잘 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웬걸 뒤에서 수군거리고 그저 예수님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데 집중해 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지금의 모습은 과연 1절에 가깝습니까? 2절에 가깝습니까? 내가 철저히 죄인임을 깨닫고 주의 말씀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난 그래도 이정도면 신앙생활 잘 하고 있어 안심하면서 저 사람은 저러면 안되는데 하고 이 사람은 이러면 안되지.. 지적의 은사와 비난과 판단의 은사를 사용하는데 집중하고 계십니까? 소망하기는 나이가 들수록, 신앙생활을 오래 하시면 오래할수록 1절의 모습에 가까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람과 말하는 것은 줄어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데 점점 더 집중하는 성숙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 가지 비유 중에 마지막 탕자의 비유는 내일 묵상할 말씀이고 오늘은 두 가지 비유 즉, 양 100마리 중에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목자의 비유가 4절부터 7절까지이고 8절과 9절은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영혼을 사랑하시는 마음,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을 더 확고하게 느끼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1. 첫 번째로 하나님은 한 영혼조차 귀하게 여기신다 하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4절에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여러분 합리적이고 실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한 마리가 소중합니까? 아흔 아홉 마리가 소중합니까? 당연히 아흔 아홉마리가 소중합니다. 다수를 위해 전체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 안타깝지만 그게 당연하고 지혜로운 결정입니다. 한 마리 없어졌다고 그것 찾느라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행여나 맹수가 남은 99마리를 공격하여 한 마리보다 더 많은 양들의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과감하게 하나를 포기하는 것 그게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계산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판단인데 하나님은 다르시다. 하나님은 실리보다도 숫자보다도 양 한 마리를 너무 귀하게 여기시는 분, 그저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때문에 다른 것은 눈에 안 보이실 정도로 우리 영혼들 한 영혼조차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 이걸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멸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deal 했던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 의인 50명 있으면 멸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 5명 부족하면, 하나님 의인 40명이면 어떠하시겠습니까? 30명 20명 심지어 10명까지 계속 숫자로 계산해 가는데 하나님은 어떠셨습니까? 의인 10명만 있어도 내가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관심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소돔성에 한 사람이라도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가능하면 멸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마음. 이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제자훈련 하면 브라질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 원조이십니다. 목사님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수는 184명이었습니다. 교역자들은 그 때부터 정신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2년 동안 극성스러운 조직과 전도 덕분에 교인 수는 6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3배나 교세를 확장시킨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마음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잡지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구나.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구나. 도대체 네가 전하는 일들 가운데 나의 손길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느냐?" 주님 저는 열심히 목회해서 지금 거의 세배나 성장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숫자가 아니라 죽어가는 한 영혼에 대한 관심, 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 붙들고 하나님의 영혼 구원의 마음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은 영혼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영혼 구원을 가장 즐거워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4절에 뒷부분을 보십쇼.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이 문장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신다. 그냥 찾아다니신다 하지 않고 “찾아내기까지”를 첨부했습니다. 이 찾아내기까지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헤오스 휴레 아우토”인데 왜 이런 표현을 붙였는가? 강조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끝까지 찾아내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으신다. 언제까지 찾으시는가? 찾을 때까지 찾으신다. 마침내 찾아내야만 끝낸다 그런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국 잃어버린 양 찾아내시고 만다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문에서 노크하시는 그림 생각나십니까? 문고리가 안에서만 열 수 있는 그 문을 계속 두드리시는 예수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두드리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끝내시지 않고 계속해서 마지막 심판을 또 미루시고 미루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더 기다려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전하는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 영혼을 저와 여러분이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5절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매고.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오랜 시간을 헤매면서 가시에 찔리고 넘어져 피가 나는 수고를 거듭했지만 일단 양을 찾게 되니까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이 피곤한 것은 뒤로 한 채 그 양을 자기 어깨 위에 올리고 목에 끼운채 환호성을 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목자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빠가 자녀를 목마 태워서 놀아줄 때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 힘들지만 너무 행복한 아빠의 모습, 스바냐 3장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빠의 즐거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즐거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병에서 나음을 입고 감사하러 온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던진 질문은 뭐였습니까?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 나머지 아홉을 찾아내시고 아버지의 즐거운 얼굴을 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8절과 9절에 열 드라크마 중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여기서 우리는 결혼 예물을 잃어버린 여인, 즉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잃은 여인의 마음으로 그렇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비유는 앞에 100마리 중에 한 마리 잃어버린 것과는 많이 다른 비유입니다. 엘리콧이라는 신학자가 이 구절을 잘 해석했는데 열 드라크마는 노동자가 10일 동안 일한 품삯이라는 의미 말고 결혼식 때 남편으로부터 받는 일종의 결혼 예물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여인이 결혼의 징표로 남편으로부터 은줄로 엮은 열 개의 은전을 받았다는 것, 열 드라크마가 바로 그 은줄로 엮은 열 개의 은전이라는 것, 그런데 거기서 하나가 없어졌으니 9개로는 의미가 없는 9개로는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 마음, 여러분 결혼증표로 무슨 선물을 배우자에게 받으셨습니까? 그게 금반지이건 구리반지이건 그 자체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사랑의 증표임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사랑하시고 찾으시는 마음은 마치 한 드라크마 잃어버려 사랑의 증표를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여인의 마음이시다. 그 정도로 사랑하시기에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는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전부를 다 주셔서라도 우리를 구원해내신 하나님. 다시 사랑을 회복하시고 싶으신 하나님,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으시고 구원받으신 분들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이 구절보다 더 가슴 찡한 구절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입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널 버릴 수 없다는 표현이 호세아 11장 8절에 나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저와 여러분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기억하시고 다시 감격하시고 뜨거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