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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바라 보면 안되겠니?

새벽예배 2023.07.31 | 사도행전 16장 19-40절 | 이선기 목사




사도행전 16장 19-40절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새벽 묵상


여러분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 창세기 22장에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 이야기, 민수기 21장에 불평하는 광야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신 이야기, 이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 다 당장은 약간 매정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으나 결국에는 매정이 아니라 애정의 하나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라. 즉 나만 바라보면서 살면 안 되겠니? 하시는 하나님의 애정어린 속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에서는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면서 높은 탑을 쌓는 백성들의 언어를 분열시키시면서 흩어지게 하시는 하나님,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다가 망가지지 말고 가장 높으신 분 하나님만 바라보라 하는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2장에 아들 이삭, 100살에 낳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귀한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죽여 바치라 명령하시는 매정하신 하나님, 자식 사랑이 지나치면 소유물로 집착하게 된다. 자식보다 나 하나님께 집중하면 안되겠니?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엄마의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마마보이가 많은 요즘 같은 시대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민수기 21장에서 광야생활이 불편하여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시는 하나님,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장대 위에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려주시는 하나님, 지금 눈 앞에 절망적인 상황에 낙담하지 말고 말도 안 될지 모르지만 단지 눈을 들어 나만 바라보라 하시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까지 표현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을 빨리 발견하시고, 세상에 유한한 것들, 잠깐 쓰다가 두고 갈 것들에 너무 마음 주지 마시고 하나님만을 향하여 사는 그리스도인, 건강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도행전 16장의 이야기 빌립보성의 귀신들린 여종을 바울과 실라가 고쳐주었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밤중에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려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죄수들이 다 도망가서 자결하려 하던 간수를 막으며 16장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정말 그 말씀대로 간수와 그의 가족 모두를 구원해 내는 감동적인 드라마틱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자체를 좋아해서 이런 본문을 만나면 너무 좋아하고, 믿습니다를 세게 발음하시고 아멘도 크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철저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사는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의 극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사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과 귀신들린 여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면서 사는 하나님 없는 인생들의 극명한 대립의 모습, 저와 여러분들 속에 아직도 이런 욕구 채우는 이기적인 모습이 남아있다면 하루 속히 말끔히 정리하시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 하나님이 내세울 만한 욥과 같이 시험해 보라고 내세울 만한 그런 성숙한 믿음의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선 오늘 본문 긴 본문 속에서 먼저 하나님을 바라봄이 없는 인생의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9절 첫 구절을 보십시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여기서 “주인들”은 헬라어 큐리오스의 복수형 큐리오이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이 한 사람이 아니었고 여러 명 이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합니다. 아마도 당시 점치는 이 여인의 수입이 상당히 많았기에 여러 주인이 공동으로 이 여종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라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1. 첫 번째 교훈, 한 사람의 영혼보다는 자신의 경제적 손익관계를 더 중요시 여기는 우리의 본성을 발견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정말 머니머니 해도 머니인 것 같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이나,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하시는 말씀이 아주 정확합니다. 앞에 사도행전 5장에서 줄초상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뒤에 사도행전 19장에 돈의 노예가 되어 바울을 핍박하고 복음을 훼방한 에베소의 은장색 데메드리오 이야기가 나오는 데 역시 마찬가지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을 쥐고 흔드는 이 돈에 대한 집착을 이겨내고 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시면서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는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바로 이 여종의 주인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0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절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이 여종의 주인들은 의아하게도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이라고 고소하였습니다. 즉 로마시민인 자신에 대한 우월감의 모습입니다.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였다는 것과 로마 사람들이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한 것도 당시 헬라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반 유대의 민족적 감정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참 비열하고 교묘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들만 이런 게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교민들이나 혹은 교회 교인들을 이용하려고 다른 마음을 품고 교회 나오시는 이들을 가끔 발견합니다. 우리도 이민자이고 이 땅에 처음 정착한 이들도 이민자였고 이 LA에 사는 많은 이민자들, 우리는 사실 더불어 사는 존재들입니다. 조금 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월감을 버리고 서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멕시칸이든지 아시안이든지 백인이든 흑인이든 황인이든 내 속에 편견이 사라져야 합니다. 조금 더 마음을 넓히고 편견을 버리고 시야를 넓히시기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이 여종의 주인들은 하나님의 권세보다 세상 권세를 더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다시 21절을 보십쇼. “로마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 보다도 로마시민권이 무슨 최고의 권세 증명서인 것처럼, 세상 권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사는 존재들, 저와 여러분도 자칫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중에 혹시 정치적인 힘을 가지려고 하는 분, 하나님보다 정치적인 힘이 앞서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보다 가방끈을 더 중요시여기는 분들 있습니까? 다짜고짜 처음 보는 분한테 학교 어디 나왔냐고 물어보는 실례를 행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가방끈에 대한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집이 어디세요? 물어보면서 집 위치에 따라 집 크기와 동네 위치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분 있습니다. 21절 “로마 사람인 우리가”라는 구절 그대로입니다. 교회는 정치적 운동 공동체가 아닙니다. 학교가 어디 출신인가가 중요한 학연 공동체도 아닙니다.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는 그런 곳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인 공동체, 누구든,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용서받은 죄인의 기쁨을 알고 모인 공동체 우리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 바라보기만 하면 눈물이 흐르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게 나의 가장 큰 자랑거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새벽에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사람의 영혼보다 경제적 손익관계부터 따지는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적 우월감, 일명 갑질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세상 권세에 대한 집착들을 내려놓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고 하나하나 내려놓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렇게 여종의 주인들은 철저히 하나님 없이 사는 존재였는데 비에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달랐는가?

1. 첫 번째로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25절 보십쇼.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한밤중에 즉, 하루 종일 매를 맞고 고문당한 바울과 실라가 정신 없이 쓰러져 잠들어 있을 상황인데도 죄수들 다 듣도록 기도하고 찬송했다는 것, 여러분 이게 바로 예수 믿는 자, 하나님 바라보는 자의 특징입니다.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기도와 찬송했던 사람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십니까? 밤을 새워가면서 철야로 찬송하고 기도했던 적이 최근에 언제이셨습니까? 밤을 새워가면서 철야로 기도하는 나라와 민족은 세계에서 한국 민족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일본과 북한에게 너무나 많은 핍박을 받았던 민족, 오죽했으면 아들을 죽인 권수를 양자삼은 손양원 목사님이 나왔겠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 한국 기독교 선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하는 말씀 붙잡고 소나무 뿌리 뽑을 때까지 기도한 우리 선배들, 찬송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목이 쉬도록 북을 치면서 해병대 박수를 치면서 열심히 찬송한 우리 선배들, 우리가 똑같이 할 수는 없어도 그 흉내라도 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2. 두 번째로 바울과 실라는 육신의 고통 중에서도 간수의 영혼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27절 보십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지금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렸는데 죄수들이 다 도망간 것처럼 바울과 실라도 도망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 내 육신 해방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자결하려는 생명을 포기하려는 간수를 향해 28절 크게 소리 지릅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바울과 실라,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모든 관심이 생명 구원, 영혼 구원, 가족 구원에까지 있었던 바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냥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집중해서 보니까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여기는 영혼 구원에 열정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 구원의 갈급함과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바울과 실라는 환란 가운데서도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40절 맨 마지막 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여기 위로하고 가니라. 이 위로가 너무 특별합니다. 지금 감옥에서 매 맞고 고문당하고 잠도 못자고 고통스러워 위로 받아야 할 바울과 실라가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했다는 것, 여러분 이게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그리스도인 저와 여러분이 한 분도 빠짐없이 그런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위로하는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신경 쓰는 일, 돈과 우월감과 권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기도와 찬송과 영혼 구원의 회복운동이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위로받는 자가 아니라 이제 위로하는 자로 사시면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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