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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2.09.09 | 창세기 21장 8-21절 | 구진모 목사



창세기 21장 8-21절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새벽 묵상


오늘은 이삭의 잔칫날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해 주면서 특별히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를 베풀고 모두를 불러 함께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잔치가 한창인데 어린 아들 이삭이 없어진 것을 사라가 안겁니다. 그래서 "아기가 어디 갔나?" 찾다가 이삭이 이스마엘과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9절입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 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갈과 이스마엘을 눈에 가시 같이 여겼는데 다 큰 녀석이 이제 갓난아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노는데, 놀리며 노는 겁니다. 그래서 이대로 놔주었다가는 큰 일 나겠다는 생각에 아브라함에 유구합니다. 



10절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쫒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쫓으세요.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요청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이스마엘도 엄연히 자신의 자식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사랑해 왔고 기대해 왔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스마엘과 이삭이 서로 사이좋게 한 집에서 화평하게 살기를 기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본 부인이 갑자기 “내 쫒으라”고 강짜를 부립니다.  



그래서 11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에 매우 근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내쫓기는 해야겠는데 그러려니 불쌍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저것들이 나가서 어떻게 사나?” 그러나 데리고 있자니 갈등이 끊일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깊이 근심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대답을 주셨습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라” 내보내라는 겁니다. 



그래도 아브라함 마음 한구석에서는 “저들이 쫓겨나면 어떻게 사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로해 주십니다. 13절입니다.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스마엘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해줄 것이니 마음놓고 보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믿고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께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려가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살을 에이는 듯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모자를 떠나 보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정착할 장소로 제대로 가지 못하고 중간에 사막으로 잘못 길을 들어서서 방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물도 떨어지고 이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16절을 보면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울었다”고 했습니다. “내 자식 죽는 거 내 눈으로 못 보겠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방성대곡 절규를 한 겁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18절입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그 후 샘물을 허락하시고, 그 물을 아들에게 마시게 해서 생명을 건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아브라함 가정 속에 일어났던 이 사건을 지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한 여인의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겁니까? " 아니면 “배 다른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남자들은 조심하라”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가정의 이 사건을 예로 들으면서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8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즉,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은혜로 태어난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이삭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은 누구입니까? 이스마엘은 인간적인 능력과 수단에 의하여 얻게된 자녀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의 선행과 공로로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 자들이 이스마엘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두 아이가 서로 갈등했듯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이삭과 이스마엘이 서로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즉,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이스마엘적 마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이삭적인 마음, 이 두 마음이 우리 마음 속에서 갈등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볼 때 어느 쪽이 더 우세 할 것 같습니까? 갈라디아 4:29절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 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 이스마엘이 훨씬 더 큰 아이였고, 어린 이삭을 놀렸듯이,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선행, 그리고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이론이 훨씬 더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한 쪽에서는 육신의 욕망과 자기 의, 나의 옛 사람이 나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꿈틀거립니다. 그 거룩한 마음을 육신의 마음이 조롱하고 방해하고 가지고 놉니다. 



이렇게 서로 두 마음이 싸울 때 해결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30절에 대답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쫒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사라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왜 내 쫓아야 합니까? 두 존재는 결코 타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을 내쫓는 것이 쉬운 일이냐?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아브라함은 그 일로 인하여 “매우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육신의 생각과 나의 주장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나의 생각에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려고 하는 두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을 때, 인간은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내는 겁니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옛 사람을 쫓아 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옛 성품, 육신적 생각,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유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시간 우리 모두 영적인 갈등 속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셔서, 우리 속에 있는 은혜가 아닌 바리새인적인, 율법주의 적인, 교만한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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