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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01.12 | 빌립보서 1장 22 - 30절 | 구진모 목사




빌립보서 1장 12-21절


1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1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1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1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1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1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1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1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2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새벽 묵상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하면 두려운 생각을 가질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이 찾아 오는 것이니 걱정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실 성경에 보면 죽음에 대한 기록들을 많이 해 주고 있는데, 그 말씀들을 보면 죽음 자체보다 죽음 이후에 되어질 일에 대해서 기록을 많이 해 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죽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바울은 죽음을 “세상을 떠나서” 떠나는 것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표현은 마치 배가 어느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항해하기 위해 닻을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죽음이란 이 땅을 떠나서 또 다른 항구로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을 한 겁니다. 또 다른 항구가 어디입니까? 천국을 말하는 겁니다. 



또 고린도후서 5: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바울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천막을 거두고 여행을 떠나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예)유목민들의 생활을 보면, 계절따라 짐승들의 풀을 찾아 천막을 쳤다, 거두며 장소를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천막 안에서 사는 일시적인 삶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이 세상으로부터 다음 세상으로의 이동일 뿐이라는 겁니다. 



또 히브리서 11:16절에 보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리고 끝 부분에 보면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서독에 광부로 가서 일하기도 했고, 중동의 건설 현장에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향에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같이 이민자들은 더욱 이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애틋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고향집에 가는 귀가입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고향집이 더욱 가까워졌다는 겁니다. 



찬송가 239장 가사도 보면 “저 뵈는 본향집 날마다 가까워 내 갈길 멀지 않으니 전 보다 가깝다


더 가깝고 더 가깝다 하룻길 되는 내 본향 가까운 곳일세”



끝으로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놀랍고 영광스런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싶다는 고백을 확신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순간적으로 그리스도를 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그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잊어버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주님을 항상 만나 뵙고 영원토록 주님을 바라보며 지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주님의 얼굴을 영원토록 뵙는 겁니다. 그것이 천국이고 영원한 축복입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죽음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 장막을 걷고 떠나면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간섭도 없이, 끊임없이 주님과 완전한 교제를 누리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오늘 본문 27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어떤 생활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생활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24절 말씀처럼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1-12절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할 때 꼭 기억 할게 있습니다. 본문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것은 단순히 천국가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천국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할 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할수 있는 시기가 있고, 기회가 있고, 환경이 있고, 일군이 필요한 때가 있고, 일군을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일해야 합니다. 할 수 있을 때 미루지 말고, 힘이 있을 때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 없습니다. 때로 우리가 주의 일하다가, 주를 위해 살다가 겪게되는 고난에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흘린 땀은 귀한 겁니다. 주님 때문에 보는 손해가 있다면 주님께서 더 값진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겁니다. 주님 때문에 참으며, 주님 때문에 흘린 눈물들 결코 외면치 아니하실 겁니다. 주님 앞에 쌓은 기도의 소원들, 때가 되면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줄 믿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이, 이 어둠의 땅이 복음화 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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