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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단을 버리고

새벽예배 2022.05.09 | 고린도전서 4장 1-8절 | 이선기 목사



고린도전서 4장 1-8절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새벽 묵상

어떤 의과대학의 한교수가 곧 현지 병원에 나가 환자를 돌볼 의사 인턴들에게 한 사례를 들어주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두 사람에게서 네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둘째는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는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럴 때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학생들은 하나같이 같은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매독균에 감염된 아버지와 결핵환자인 어머니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도 병에 걸리거나 죽을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 유산시켜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5째로 태어난 아이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당히 편견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그 편견과 과거의 잘못된 기억으로 인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세상에 믿을 만 한 놈이 없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정말 그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협하기 쉬운 사람의 판단 말고 만물을 지으시고 편견이 없이 가장 정확한 판단을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환상 중에 하늘이 열리며 보자기에 각종 부정한 짐승들이 싸여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어나 잡아먹으라”하시는 음성에 베드로가 대답하죠. “저는 대대로 부정한 짐승들을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3번씩이나 반복적으로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신 의도가 무엇일까? 베드로의 편견을 깨라. 베드로의 판단이 잘못 되었다. 바울을 통한 이방인 전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이요 뜻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생각할 때는 도무지 아니어도 내가 판단할 때 이거는 완전 아니다 하여도, 내 판단엔 분명히 편견과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시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의지하고 그 뜻을 믿고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왜 사람을 판단하고 그 신념에 따라 따라가느냐? 교회가 직면한 분쟁문제 사람 따라 이리 나뉘고 저리 나뉘는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고린도전서 4장의 내용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편견을 벗어 버리고 내 판단을 겸손히 내려놓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런 내 판단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가?


1. 첫 번째로 바울은 자신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1절 보십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바울이든지 아볼로이든지 게바든지 사역자들은 주인이 아님을 분명히 알라고 했습니다. 오직 맡은 자로 여기는 것,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의 “맡은 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무스라고 하는데 “집을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집을 관리하며 가산을 맡아 책임지는 청지기가 바로 이 오이코노무스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과 모든 지도자들이 가져야 될 마음자세가 바로 이 오이코노무스 의식입니다.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오. 그 분의 집을 잘 관리하는 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 이게 지도자들에게 정말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누가 회장이니까? 누가 우리 대표이니까 대표의 뜻대로 합시다. 대표가 하자는 대로 합시다. 또는 다수결로 합시다. 사실은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대표도 회장도 다 사람이기에 분명히 판단을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다수결의 원리가 중요하다고 해도 민주주의가 다수결이 아니냐 해도, 그건 민주주의지 하나님 중심의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함께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 안되면 차라리 기도하고 제비뽑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사람 많은 쪽으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 판단 잘못하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기준인 교회, 그게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 세워달라고 애원할 때에 안 된다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왕을 잘 세워도 왕도 사람인지라 변질되고 타락하기 쉽다. 잘못된 판단하기 쉽다. 그냥 사람 세우지 말고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답답해도 하나님 의지하면 안 되겠냐? 그런데도 그 뜻을 어기고 계속 요구하니까 세우도록 겨우 허락받고 세워진 왕이 누구입니까? 사울 왕이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번이나 크게 하나님 뜻을 어기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질투심으로 수년 동안 사위 다윗 죽이려고 세월과 힘을 낭비하는 불쌍한 왕, 결국에는 길보아 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최후로 끝나고 말았던 사람. 사울이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쇼. 키도 크고 처음에 왕으로 뽑혔을 때 행구사이에 숨을 정도로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었던 사람 참 멋있는 사람, 그리고 인격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기에 권력을 가지니까 속에 욕심이 성장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 우리도 누구에게나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맡은 자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맡은 자, 언제라도 주인이 원하신다면 다 돌려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가지고 있으나 내 것처럼 잘 관리해야 하나, 내 것이 아님을 늘 잃어버리지 않는 것, 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일단 가지게 되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리차드 포스터가 쓴 책 “돈, sex, 권력”에서처럼 맡은 자들은 항상 이 세 가지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능하면 교회에서든지 하나님의 일하시는데 지도자로 쓰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되시되 맡은 자 의식을 결코 잃어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교회 직분,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직분, 말 그대로 직분이지 일하라고 맡기신 위치이지 계급이 아님을 분명히 새기시길 바랍니다. 세우신 원래 목적대로 쓰임받지 못하면 불충한 종이 될 뿐입니다. 교회 직분은 세상의 자리와 다릅니다. 어떤 위치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맡은 자 의식을 분명히 하고 주님께 충성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저는 목사로서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 목사가 무엇을 맡은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6장 4절 개역성경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그렇지 말씀 잘 준비해서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영적인 양식 먹이는 일 그리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위해서 기도하는 일, 그게 내 일이구나, 이 일에는 정말 열심히 해야지 다른 것은 잘 못해도 이 두 가지에는 성실하게 하리라 결단하게 되었는데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도 내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시고 힘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두 번째로 바울은 사사로운 데는 힘 빼고 중요한 데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3절 보십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자신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가장 잘 안다는 말이 있는데 바울은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오직 4절 맨 뒤에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절 중간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 때에”는 즉 “나를 심판하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그 마지막 심판대를 준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일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11월 중순 정도가 되면 한국에는 대망의 대학 수능시험이 있죠.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생각하니까 저희 때는 한 달에 한번 모의고사를 보다가 마지막 수능시험이 아니라 학력고사를 보았는데 제일 안타깝고 불쌍한 애들이 누구인가? 모의고사 때는 성적이 잘 나오다가 마지막 학력고사 때 죽 쓰는 애들입니다. 아무리 모의고사 때는 높은 점수가 나왔어도 대학이 인정해 주는 것은 오직 마지막 학력고사 점수였습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아마도 모의고사 때는 컨닝도 하고 별애 별 방법을 다 썼는데 원하는 대학에 가서 시험을 보니 컨닝도 할 수 없고 부정직한 방법을 쓸 수 없으니 그동안 실력을 기른 사람들은 기른 대로, 잔머리 쓴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명명백백 다 드러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의 재림 때에 하나님의 심판대도 그럴 것입니다. 그동안 아무리 사람들이 보기에 신앙 좋은 것 같은 사람도 정직하게 그가 행한 대로 결과를 보게 될 것이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로였는데도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 집중했던 사람들은 그에 맞는 영광의 상급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서 특별히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많이 신경을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저울에 가벼이 여겨질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사로운 데는 힘 빼시고 사람들의 시선 신경 쓰지 마시고 중요한 데 집중하면서 잘 준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바울은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6절 끝에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절도 맨 끝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우리는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우리 힘으로 한 것이 없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8절에는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이미 천국의 축복을 모두 다 소유한 것처럼 자만하며 자족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한 삶을 꾸짖는 바울의 풍자적 표현입니다. 계속 8절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바울이 지금 당장에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말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정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를 준비하며 지금이라도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서 풍요로운 자들이 되고 바울도 고린도 교인과 함께 그 영광에 동참하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이 땅의 칭찬이 아니라 오직 겸손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1 :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을 가르치시고 아무 죄 없이 가장 겸손한 죽음,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물과 피를 다 흘리며 돌아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메시지를 통해 예수님의 삶 속에서 꼭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겸손입니다.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란 글이 있습니다. 읽어 드립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장점을 먼저 생각한다. 십계명을 대할 때에도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명하신 것을 지켰으므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하라고 명하신 안식일을 지키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라를 충실히 지켰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겸손한 사람은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은 언제나 자기 뒤로 밀어 내고 자기 위주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고 이웃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우선 당장 코앞의 것. 보이는 것만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나를 돌아보아 체질이 진토임을 시인하는 사람이다.(시103:14) 교만한 자는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하고 항상 불만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겸손한 자는 상대방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만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권력이 얼마만큼 휘둘러지나 얼마나 강한가를 꼭 시험하고 만다. 겸손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자신을 녹여서 한 시대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인도자가 되고자 할 것이다.

겸손함으로 사람의 판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판단에서 인정받는 참 그리스도인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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