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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별 주관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3.09.23| 히브리서 11장 17-31절 | 구진모 목사




히브리서 11장 17-31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새벽 묵상


본문 2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모세를 가리켜 “아름다운 아이”라고 한 것은 인품이 아름답다고 한 겁니다.  사실 모세의 생애를 보면 그 삶이 아름답고, 그 믿음이 참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믿음이 무엇이냐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뿌리깊은 믿음이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살다보면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나무를 가만히 보아도 뿌리가 깊은 나무는 가뭄이 드는 해에도 걱정없이 잘 자라고 크게 자랍니다. 그래서 아주 큰 재목이 됩니다. 그리고 기초가 깊은 집은 견고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뿌리도 중요합니다. 본문 23-24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24절에 보면 또 “모세가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했다”고도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믿음으로 … 왕의 명령도 무서워하지 않는 믿음” “믿음으로… 거절할 것을 거절할 줄 아는 믿음” 을 보게 되는데, 이런 믿음이 뿌리가 깊은 믿음입니다.  



예를 들면 요셉은 17세에 형들의 손에 의해서 애굽 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 종살이를 합니다. 보디발은 지금으로 말하면 왕의 경호실장쯤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잘 생긴 요셉을 유혹을 합니다. 눈 딱 감고 그 여인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 집에서 편안하게 잘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면 안된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믿는자로서 거절할 것을 거절할 줄 아는 사람, 그 용기와 그 믿음을 성경은 아름답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 사탄이 뱀으로 둔갑하여 하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그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 그 유혹에 빠져서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천추의 한이 되게 하는 불행을 가져다 주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봐도 거절할 줄 아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가 바로 그런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장성한 후에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궁에 들어가 공주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모세가 평생의 어떤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공주의 아들만이 누릴 수 있는 부귀와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이것이 아니다” 하고 박차고 나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뒤에 치루게 되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지만, 만약 그 때에 모세가 그 자리를 거절하지 못하고 왕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으로 만족했다면, 모세의 인생은 거기서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거절했기에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렇게 거절하기 까지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된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낳을 때에 믿음으로 낳았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기도 많이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낳자마자 나일강에 버리라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아들을 석달 동안이나 숨겨 정성껏 길렀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더 이상 기를 수 없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맡아서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부모의 신앙을 물려 받았던 겁니다. 이런 뿌리 깊은 믿음이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뿌리를 깊이 내린 믿음은 어디 가서나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일당 백의 믿음이 되는 겁니다. 이 믿음을 가리켜서 성경은 아름다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뿌리깊은 믿음이 자손들에게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뿌리깊은 믿음은 참여하는 믿음입니다.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온갖 좋은 것을 다 갖춰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에 사람을 하나 만드셨는데 남자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시고도 좋지 않다고 보셨는지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들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한 가정은 운명을 같이 하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한 식구가 되어 성공하면 함께 성공하는 것이고, 망하면 함께 망하는 겁니다. 이 사회만 해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망했는데 나 혼자만 잘 살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더불어 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가 사업을 시작하여 물건을 팔려고 해도 사람들이 다 망했으니 누가 그 물건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불행에 대해 눈감으면 안됩니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고난에 참여해서 함께 울고 함께 살아야만 하는 겁니다.



본문의 25절을 보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26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왕궁을 버리고 종살이 하는 자기 동족에게 뛰어 들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즐거워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고난에 모세가 뛰어들지 않고 동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모세는 추앙받는 인물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방관하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할 때,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생할 때, 같이 참여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일에 발 벗고 뛰어 들어서 같이 동참하는 믿음을 성경에서는 아름다운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세번째로 아름다운 믿음은 모험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는 것은 모험적인 믿음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모험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아무 일에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는 것이다”고 생각될 때에는 우리가 몸을 던져 모험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무모한 모험을 했다가는 망신 당하는 일밖에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중에 마귀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사뿐이 뛰어 내리면 천하만민이 당신을 따를 것이라고 할 때, 뛰어 내릴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책망하면서 마귀를 물리치셨던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모세는 그 길로 가면 홍해가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모세가 계산을 하고 200만이 넘는 백성들이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들라고 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애굽땅을 떠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순종하고 갔습니다. 갔더니 하나님께서 그 홍해를 가르시고 육지와 같이 건너게 하셨던 겁니다. 이것이 모험적인 믿음이고, 또한 승리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먹을 양식을 하나도 구할 수 없는 광야로 아무 준비도 없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실 때 모세는 떠났습니다. 모험중의 모험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나갔더니 하늘의 양식인 '만나' 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메마른 광야 한 복판에서 반석에서 생수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나갔더니 가나안 땅까지 가는데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겁니다. 



이렇게 모험적인 신앙인이 가는길에는 반드시 하늘이 열리고, 반석이 터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험적인 신앙은 아름다운 겁니다. 이런 모험적인 신앙이 여러분들의 생활에서 열매 맺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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