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09.26 | 창세기 28장 1-9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28장 1-9절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새벽 묵상
여러분 가롯 유다가 나쁜 사람입니까? 베드로가 나쁜 사람입니까? 돈 받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사람이 나쁩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난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한다 하고 모른 척 한 사람이 나쁩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돈 받고 팔아넘긴 거나, 난 그 사람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한 거나 사실 별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둘 다 배신입니다. 훔친 것은 죄이지만 밖에서 누가 오나 안오나 망보는 것도 같은 죄입니다. 돈에 잠깐 눈이 멀은 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니까 모른 체 한 거나 도낀 개낀입니다. 가롯유다와 베드로의 진짜 차이는 무엇인가? 후회냐? 회개냐의 차이입니다. 가롯유다는 후회는 했을지언정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회개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나머지 인생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마지막에는 거꾸로 십자가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어떻게 죄를 지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변하여 행동이 바뀌는 것, 아무리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후회라는 한자어로 풀이해 보면 뒤 후 자에 뉘우칠 회 자를 씁니다. 사건 이후에 뉘우친다는 뜻입니다. 반면 회개는 회 자는 똑같이 뉘우칠 회 자에 고칠 개 자를 씁니다. 후회랑 뭐가 다릅니까? 뉘우치는데 그치지 않고 행동이 고쳐지는 것 그게 회개입니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실수했구나 생각하면 생각만 하지 말고 실제 행동이 바뀌고 완전히 다르게 살아가는 것 그게 회개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에 대한 질투 때문에 수년 동안을 허황된 인생을 살아갑니다. 다윗이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살려주자 잠깐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뭐였는가? 행동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회는 되었는데 개가 안 되서 결국 쓸쓸하게 길보아 산 전투에서 스스로 칼에 엎드러져 죽어 비참하고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재산을 다 허비하고 진심으로 후회합니다. 내가 내 욕심대로 잘못 인생을 살았구나. 돼지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깊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가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끝났으면 사울왕이랑 다를 바 없습니다. 탕자는 생각을 바꿀 뿐만이 아니라 행동이 바뀝니다.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게 바로 돌아설 “개”입니다. 결국 아버지 품에 안기게 됩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하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최고로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후회에서 끝나는 인생 되지 마십시오. 나중에 후회하고 거기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행동이 고쳐져야 합니다. 행동이 바뀌고 돌아서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사람 탕자 되시길 바랍니다.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회개하지 못하고 후회에 그친 인생입니다. 바로 야곱의 형 에서의 모습, 여러분 어제 본문인데요. 창세기 27장 41절에 보면 동생 야곱이 형인척 하고 축복의 기도를 가로챔을 알게 된 에서는 야곱을 미워하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동생 야곱을 죽이리라 결심하게 됩니다. 분명히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잘못은 모르고 동생에 대한 원한으로 옛날 가인처럼 동생을 죽이리라 결심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단추가 맨 처음부터 잘못 끼면 줄줄이 잘못 끼워지듯이 장자권 문제가 잘못 끼워지니까 그다음 결혼 문제도 계속 잘못됩니다. 26장 34절에 보면 에서가 40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아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고 나와 있는데 에서가 계속해서 엉뚱한 길로 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 다시 에서가 어긋나는 것을 마지막 두 절에서 또 보게 되는데 8절 보십쇼. “에서가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절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에서는 계속해서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8절 시작하는 단어 “에서가 본즉” 즉 자기 생각에 빠져 아 내 이방에서 취한 아내들이 아버지에게 잘 못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거구나 생각하고 그럼 다시 아내를 이방아내 아닌 사람으로 취하면 되지 하고 또 아내를 얻었는데 누구의 딸입니까? 이스마엘의 딸,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또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저 내 생각대로, 내 판단대로 결정했다는 사실, 6절 시작할 때도 8절 시작할 때도 “에서가 본즉”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28장 저자의 의도를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가 아니라 아버지 이삭이 보니도 아니고 에서가 본즉, 철저하게 자기 생각 때문에 계속해서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에서의 삶
여기서 우리는 후회에서 회개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의 첫 번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내가 기준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4장의 가인의 후손 중에서 라멕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가인 다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두 아내 아다와 씰라를 맞이하고 아내들에게 이렇게 큰 소리를 칩니다. 창세기 4장 23절 24절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여러분 짜증나지 않습니까? 소년을 죽이고 자랑하면서 가인이 일곱 배 벌 받았으면 나는 칠십 칠배 받겠다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아주 교만하고 포악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라멕의 말을 들어보면 다 일인칭입니다. “내 목소리를”, “내 말을”, “나의 상처로”,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철저히 이기적인 나만 생각하는 인간의 대표였던 라멕, 나를 지으시고 내 삶을 주관해 가시고 인도해 가시는 분이 누군지를 깨닫지 못하니까 그저 내가복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반면 내가 주인 된 인생을 살아가다가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인생이 바뀐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쇼.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여러분 내가 죽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주님께서 내 죄 때문에 내 대신 죽어 주셨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 앞으로의 삶은 내가 철저히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셔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주님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것,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복음 되지 마시고 내 삶에 주님의 복음을 써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두 번째로 후회까지밖에 못하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본즉”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6절의 에서가 본즉 8절의 에서가 본즉이란 문장은 그저 구경꾼으로 끝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깨닫게 합니다. 회개, 즉 행동이 바뀌려면 “본즉”, 즉 구경꾼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만약에 에서가 하나님과 진심으로 교제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기 어려웠다면 다시 이삭에게 가서 요청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빼앗긴 장자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목 놓아 기도했어야 합니다. 혹은 이삭에게 “아버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포기하시는 건가요?” 뭔가 목마른 요청, 영적인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본즉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구경꾼에서 끝나고 맙니다.
가롯유다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붓고 씻길 때에 옆에서 “이 향유 값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데 왜 허비하는가” 했던 구경꾼이었습니다. 욥의 아내는 욥이 고통당할 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했던 구경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좋아서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덩실 덩실 춤추는 다윗을 보고 미갈이 다윗을 조롱합니다. 아니 왕이 체면도 없으십니까? 이 무슨 추한 모습입니까? 다윗은 미갈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 보다 더 추해 보여도 무슨 상관인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집에 들어오시는 기쁨,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기쁨,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찬송 부를 때 가만히 있으시면 안됩니다. 내 대신 주님은 저 십자가에서 대신 피흘려 죽으셨는데 일어나는 것이 창피합니까? 춤 추는 것이 창피합니까? 여러분 구경꾼은 그저 멀리서 보고 판단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그저 관객정도로 끝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심판대에서 천국 pass를 받고 다 들어가는데 여러분 구경하고만 계실 것입니까? 구경꾼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어떤 여인을 너무너무 짝사랑하는 남자가 매일 편지를 썼는데 여인이 누구랑 결혼했다구요? 매일 편지를 전해주면서 만나는 우체부랑 결혼했답니다. 여러분 매일 편지를 쓰는 남자는 구경꾼이었습니다. 결국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후회하지 말고 회개하고 행동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어정쩡하지 마십시오. 강하게 결단하고 끊어야 합니다. 다시 9절 보시면 에서가 가나안 여인 두 명 말고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한 것, 학자들은 세 명이나 아내를 맞이한 것이 문제였다는 분도 있는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에서가 그래도 에서가 본즉, 즉 자기 생각으로 뭐라도 행동을 바꾸기는 바꾸려고 했구나.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끊어버리는 결단이 없었구나. 여러분 에서가 여기서 돌아서서 회개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버지, 어머니에게 찾아가서 나도 어떻게 하면 이 잘못된 결혼을 다시 고칠 수 있는지를 상의했어야 합니다. 에스라 10장에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들이 자녀까지 다 내어 쫓는 아픔을 경험하는 것처럼 뭔가 뼈를 도려내는 결단 그런 분명한 결단이 있었다면 에서의 그 다음의 삶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에서는 이런 결단이 없이 그저 문제를 자기 방식으로 잘 덮어 버리려고 하는 얄팍한 방법을 썼다는 것, 그래서 오히려 문제를 더 가중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결단입니다. 어정쩡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결단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더 이상 애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잘라낼 것을 잘라내시길 바랍니다. 버릴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질질 끌지 마시길 바랍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셨습니다. 옷만 새 옷으로 입지 마시고 벗을 것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는 새 사람 되시길 회개의 사람, 새 사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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