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02.14 | 누가복음 12장 22-34절 | 이선기 목사
누가복음 12장 22-34절
22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절.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절.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절.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절.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절.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절.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절.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절.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절.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2월 14일 새벽 묵상
아주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사시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매일 혈압과 혈당을 점검하며 소화가 안 되고 거북해지면 혹시 내가 위암이 아닌가 생각하시고, 머리가 아프면 혹시 뇌종양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자기 몸 건강에 집착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이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강 프로그램인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소파에 앉아 시청하시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너무 심각한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상하여 며느리가 주방에 있다가 시아버지에게 달려와서 물었습니다. "아버님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는 흐느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저기서 얘기하는 게 나하고 증세가 너무 똑같다. 아무래도 내가 저 병에 걸린 게 틀림없어 큰일 났다. 에미야 내가 이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하셨습니다. 며느리는 아버님을 진정시키고 도대체 '무슨 병인가?' 하여 같이 TV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방송이 거의 끝나게 되면서 아나운서가 이렇게 방송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여성의 병 자궁암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여성분들 건강 조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와 초조는 하나님을 빼고 계산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하나님 없이 이런 저런 염려 속에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염려를 이겨낼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 하나님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염려는 치사율이 높은 악성 바이러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에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젊은이들을 30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통계를 냈습니다.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뒤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심장마비나 기타 다른 질병에 걸려 죽은 미국시민은 무려 백만 명에 이른다. 전쟁하다가 죽은 것보다 3배 이상이 염려 근심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는 언급이 365번 나와 있다고 통계를 냈는데 365일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함으로 염려, 걱정, 근심을 이기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 신학자가 일세기를 살던 초대교인들의 삶이 기록된 서류들을 뒤지다가 그들의 문서에서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름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티테이오스 쟌, 티테이오스 폴, 티테이오스 나바” 왜 이름 앞에 티테이오스라는 말이 붙어 있을까? “티테이오스”를 찾아보니 뜻이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란 표현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 앞에 걱정 근심 염려가 닥칠 때마다 내 이름 앞에 티테이오스를 붙이시고 기도하면서 이겨내시면 어떠실까요? “티테이오스 이선기,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선기, 티테이오스 아무개, 염려하지 않는 사람 아무개” 오늘 하루 염려 없이 사시길 바랍니다. 평생 동안 염려하지 않는 사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늘어났는가? 지난 토요일 이 누가복음 12장을 시작하는 부분에서 1절 첫 문장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선생님 예수님은 역시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마치 유명 연예인 매니저처럼 어깨가 올라가고 큰 소리 치게 되고 그런 상황을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훈하실 필요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들 왜 사람들을 의식하느냐? 믿음의 사람은 사람 의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하나하나 짚어주십니다. 그래서 1-12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외식하는 것을 주의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어제 본문인 13-21절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 탐욕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 22-34절은 염려 하지 말아라 교훈하십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어제 본문 13-21절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려라 하시는 교훈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즉, 부자들 당대 세력가들을 향한 말씀이었고, 오늘 본문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부릴 여유가 없는 가난한 평민들에게 필요한 말씀 염려하지 말아라 하는 교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유한 이들에게도 복음이 들려져야 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그에 맞는 복음이 전해져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을 전하고 계시는가?
1. 첫 번째로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24절 보십쇼. “까마귀를 생각하라” 마태복음에는 “공중의 새”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은 왜 좀 더 구체적으로 “까마귀”라고 했는가? 아마도 누가가 세심한 의사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중의 새든지 까마귀든지 이들은 말없이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인간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로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처럼 농사를 지어 곡물을 저장해 놓는 골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창고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까마귀는 먹는 문제로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직접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에게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가져다 준 존재가 바로 이 까마귀라고 되어 있는데, 공중의 까마귀가 이처럼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 과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무슨 말할 필요가 있느냐? 24절 끝에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하시는 주님의 교훈에 아멘 하는, 염려 생길 때마다 까마귀 보며 힘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백합화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27절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신학자 쿠퍼에 의하면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붉은 아네모네 꽃이 바로 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백합화일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모든 들꽃의 대표로 사용된 꽃이 바로 이 꽃이었습니다. 무더운 날씨와 메마른 토양에서 비가 제 때 내리지 않으면 말라 죽는 백합화, 죽으면 이 꽃들은 땔감용으로 거두어 아궁이 속에 던져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서 수명이 짧고 무상하며 가치 없는 이 들꽃하나를 생각해 보라 그런데도 그 하찮은 꽃인데도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고귀한지...최고의 부귀와 영광을 누린 솔로몬의 입은 옷이 감히 흉내 낼 수 없었다. 28절 중간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고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떻게 이 꽃들보다 약할 수 있겠느냐? 여러분 아멘입니까? 우리 중에 실수로 이 땅에 태어난 사람, 어쩌다 태어난 사람, 왜 태어났는지 모르게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계획하시고 어머니 뱃속에서 10달 동안 자라다가 부모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며 태어난 인생,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귀하고 또 귀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육신의 부모에게도 기쁨을 주면서 태어났지만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부모에게 잠시 맡긴 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사실...그러므로 하찮게 대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귀한 존재임을 모르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인생, 돌아갈 고향을 모르고 죽으면 끝이다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염려가 올 때마다 두 손을 가슴에 대시고 내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데 하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나의 가치를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1절부터는 염려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이것들을 하라 하시는 주님의 교훈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제 이 31절부터 이렇게 주님의 음성으로 들리더라구요. 이것들을 하면 염려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것들 다 하기에도 너무 바쁠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31절 보십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런 것들은 무엇일까요? 예 앞에서 언급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즉 네게 필요한 기본적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바울이 로마서 14장 17절에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정확한 답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즉 당장 눈에 보이는 먹는 것 마시는 것, 그런 것들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를 이루고 평강을 누리고 희락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안에 있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어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나타나도록 구하고 행하라. 그래서 이 땅에서도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기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함께 누리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또 하나는 더 실제적인 표현으로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33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아닙니까? 악질 세리로만 불러졌던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신 주님 앞에서 그동안 살아왔던 세리로서의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삶이 바뀌어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되니까 염려와 근심이 다 사라지고 소유를 다 나누어 주고 삭개오는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 유한한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붙들게 되었다는 사실 마지막 34절은 아주 리얼하게 정확하게 한마디로 실제 삶에 도전적인 말씀을 표현하십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웨슬리 목사님이 이 누가복음 12장 34절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을 하셨죠.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까지 당신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염려의 마음을 다 벗어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배낭,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성자, 기도의 성자인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다.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 참 신앙인, 염려하지 않는 사람, 디테이오스 아무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다 디테이오스 염려하지 않는 사람 꼭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