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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신 제사장 을 알았으면 이제!

새벽예배 2023.09.19 | 히브리서 10장 26-39절 | 이선기 목사




히브리서 10장 26-39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새벽 묵상


하워드 치들리라고 하는 사람이 친구 집에서 큰 벽시계를 구경했습니다. 이 벽시계가 무려 삼 대째 내려오는 가보라고 하면서 친구는 그 시계의 내력을 자랑스럽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75년간 그 시계 소리를 들으면서 주무시고 일어나셨으며, 아버지께서는 75년을 더 사용했고 자신도 그 시계를 보고 학교에 다녔다면서 너무 정확해서 믿을 만한 시계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벽시계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치들리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벽시계에는 바늘이 빠지고 없었습니다. 태엽을 감아주니 똑딱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바늘이 없으니 시간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금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은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150년 이상 200년을 쓴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과거에 잘 맞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 몇 시인지를 알려주지 못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벽시계!

의왕 예전교회 박건 목사님이 이 벽시계 예화를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바늘 없는 벽시계는 믿음 없는 그리스도인과 비슷하다. 똑딱거리기는 하면서 정작 시간은 못 알려주는 벽시계는 열심히 말로 자기주장만 하고 믿음을 실제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과 흡사하다. 아무리 가문이 수대에 걸쳐 예수를 믿었어도 보여줄 수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얼마나 아는지, 얼마나 멋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믿음이 내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바늘 없는 백년 넘은 벽시계가 아니라 작고 볼품없어도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쓸모있는 소박하지만 꼭 필요한 그리스도인, 행함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 한 스님이 보름동안 훈련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육을 받은 후 이 스님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교육 후에 스님은 앉아만 있는 부처를 부수고 호미를 들고 서 있는 부처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행위가 중요합니다.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했는데 앉아서 신사처럼 에헴 하고 있지 마시고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열심히 일하는 농부, 열심히 일하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이 바로 히브리서 10장의 제일 끝부분,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한 번에 제사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결론 부분입니다. 7장부터 여기 10장 끝까지 계속해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반복하며 끊임없이 주님의 완전하심을 선포했던 히브리서 기자는 최종 결론으로 이렇게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으면 이제는 삶 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사는 것이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사는 것인지를 표현합니다. 행함이 중요하다. 알고 있지만 말고 실제로 행해야 한다. 정말 그렇게 살아가라. 하면서 한 가지는 하지 말고 두 가지는 꼭 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살펴보시면서 삶에 적용하셔서 아는 것을 행함으로 완전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럼 하지 말 것 한 가지와 해야 할 것 두 가지는 과연 무엇인가?

1. 첫 번째로 히브리서 기자는 짐짓 죄를 범하지 말라고 아주 따끔하게 권면합니다. 26절 보십시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절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여러분 짐짓 죄를 범한다는 표현은 우리 한국말로 거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짐짓”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십쇼. 뜻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음에는 그렇지 않으나 일부러 그렇게 행하는 것을 짐짓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히코시오우스”라는 단어를 썼는데 아주 의도적으로 일부러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왜 썼는가? 왜 일부러 죄를 범한다고 비판하는가? 알면서도 아는 그대로 실제 삶에서 행하지 않으면 결국 의도적으로 일부러 죄짓는 것이랑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데도 예수를 대제사장 그리스도로 알게 되었어도 삶에서 몰랐던 때랑 똑같이 하면 행함이 없는 자, 그저 계속해서 똑같이 죄를 짓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까 헬라어로 짐짓을 히코시오우스라고 알려드렸는데 시제가 현재분사형입니다. 현재분사형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다 한번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기만 하고 계속해서 삶 속에 전혀 행함이 없다고 계속 행함이 없다고 꼬집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행함이 없는 짐짓 죄를 범하는 이들은 아주 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29절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즉 예수님을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부인하는 것이라고 매튜 헨리 목사님은 주석합니다. 다시 29절의 그 다음 부분 보십쇼.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보혈은 모든 인간을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며 구속의 효력을 지니는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고의로 예수님의 보혈을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 즉 비웃고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문장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항상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또한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적으로 일부러 짐짓 범죄하는 자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27절 보십쇼.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9절 맨 뒤에 당연히 무거운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라합 왕이 성 앞에 포도원 주인의 포도원을 가지려고 하다가 안 되니까 왕비 이세벨이 거짓 증인 두 명을 세워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지 않습니까? 속여서 구약의 율법을 어긴 자에게 증인 두 명만 세워도 이렇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는데, 하물며 구원의 주요 생명의 주님을 정말 대적하고 모독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저와 여러분은 이미 아는 자가 아닙니까? 대제사장이요 율법의 완성자시요, 하나님과 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알았으면 달라야 합니다. 알고도 또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짐짓 죄를 범하는 자가 되지 말고, 알았으면 이제 예민한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성격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죄짓는 것에 아주 예민한 그리스도인,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알고도 다시 돌아가지 말라. 알고도 그 왔던 길로 유대교로 가지 말라 이게 바로 첫 번째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이제 두 가지 이것을 꼭 해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2.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35절 보십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것은 곧 겁먹지 말고 담대하라 그런 권면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지금 이 히브리서 기자가 속한 시대는 심한 핍박과 박해의 시대였습니다. 32절 보십쇼.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낸 것을 생각하라” 복음의 초창기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박해가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동족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더 많은 살해 위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족이기에 믿을 만한 이들에게 당하는 고난, 오히려 더 그 핍박이 처절하고 고통스러웠다는 것, 33절 보시면 유대주의자들은 로마의 박해자들과 서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때는 이렇게 박해자들과 손잡은 유대인으로서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던 자였습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유대주의자들은 도와주기는 커녕 그저 구경꾼이 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기 위해 박해하는 로마인과 사귀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 서로 합동작전을 벌여 기독교인 박해에 협공 작전을 펼쳤다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면서 중요한 것을 생각하면서 담대하라고 권합니다. 34절입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즉 고난과 박해 저 너머에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음을 바라보면 담대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 즉 이 땅에서 우리가 소유한 것은 다 유통기한이 있고 유한한 것들뿐인데 우리 앞에 곧 영원한 소유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것, 이 땅에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귀하고 찬란한 그 끝을 알 수 없는 영원한 소유의 소망을 가지면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더 낫고 영원한 소유가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는 화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 화장은 영구적이라고 해도 결국 지워지고 늘어지고 쭈구러듭니다. 그런데 거기는 정말 영구적입니다. 더 이상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늙어지는 것도 쭈그러지는 것도 변질되는 것도 없는 풍족하고 영원한 소유,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또 하나 해야 할 것, 히브리서 기자는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 36절 보십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중간에 핍박이 있다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지 마라. 끝까지 믿음 생활에 정진하라는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을 인자 셋이면 죽을 사람을 살린다고 하는데 우리는 좀 다릅니다. 참을 인자로 죽을 사람들 살렸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우리의 인내하는 것은 다시 36절 보십쇼. 인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죽을 사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다 살려내셨습니다. 잠깐 살린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장 3-4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예수 믿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참아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께서 참으신 것처럼 십자가를 끝까지 참아내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참고 견디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짐짓 죄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고도 다시 죄의 길로 되돌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큰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이미 너무 큰 상을 받은 이들이 우리들입니다. 그 구원받음에 감사하시면서 완전하신 제사장을 알고 행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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