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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와 슬픔 뿐이요

새벽예배 2023.05.15 | 사무엘하 18장 16-23절 | 이선기 목사




사무엘하 18장 16-23절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새벽 묵상

어느 무명의 작가가 시편 90편 모세의 기도를 배경으로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제목은 “그 자랑은 수고와 슬픔”

인생 그가 두려움을 떨쳐보려고 줄을 잇고 또 잇는다

인생 그가 두려움을 떨쳐 보려고 교묘히 속임수에 힘자랑도 해본다

그러나 그 연수와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젊은 아비의 굵은 핏줄 속에도 늙은 아비가 의지한 지팡이 속에도

자랑 할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인생의 자랑이 자랑인가 인생의 기쁨이 기쁨인가 늙은 아비의 눈물을 누가 닦아줄까 인생 그거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인생 그거 살아내는 게 맞는 것 같다 인생의 무게를 가볍다한들 가벼워질까

지금 행복하다고 행복이 아니요 지금 슬프다고 슬픔이 아니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여러분 무슨 느낌이 드십니까? 인생이 참 허무하구나 힘자랑도 해보고 여러 가지 수고도 하는 데 결국 기쁨이 기쁨이 아니고 인생의 무게가 참 무겁고 슬프구나 탄식하는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에 왜 갑자기 이렇게 힘 빠지는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시작할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이렇게 힘 빠지고 슬프고 괴로운 이야기들, 비극의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익스피어는 4대 비극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로 유명한데 오늘 본문은 다윗의 4대 비극의 이야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어제 본문 사무엘하 18장의 출발은 묵상하지 않았지만 잠깐 살펴보시면 어제 본문은 드디어 압살롬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결전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최고의 전략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왜 그랬는지 아히도벨의 기습 전략을 따르지 않고 후새의 전략을 채택하여 뒤늦게 다윗의 군대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서 압살롬의 군대와 마주하게 될 때에 참 곤란한 명령을 내립니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명합니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지금 태양은 하나다. 즉 다윗이든지 압살롬이든지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전쟁인데 다윗이 아버지의 마음을 놓지 못하고 내리는 명령.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지금 압살롬 군대와 다윗 군대의 전쟁은 그냥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전쟁은 무기가 좋거나 군사 숫자가 많거나 하면 이기는데 이 전쟁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전쟁이었습니다. 압살롬 군대는 크게 패하여 전사자가 너무 많아서 이만 명에 이를 정도였고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큰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서 요압 장군과 군사들에 의해서 죽임당하고 맙니다. 참 가슴 아프고 괴로운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기고도 기뻐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군대가 싸우고 동족이 서로 싸워서 허무하게 끝난 전쟁이었습니다. 그저 수고와 슬픔 뿐인 전쟁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 수고와 슬픔 뿐인 전쟁에서 첫 번째 얻을 교훈은 1.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전쟁인데 누구도 하나님께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요압이 나팔을 불어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고 17절 보십쇼. 죽은 압살롬을 처리하는 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17절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여러분 여기서 “수풀”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야르”라고 발음하는데 이 바야르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어제 본문 18장 8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압살롬 군대하고 다윗 군대가 사면으로 퍼져 싸웠는데 수풀에서 압살롬 군대가 싸우다가 너무 많이 죽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의 군대는 하나님이 그들 뒤에 계셨으니 아무리 압살롬 군대가 배나 배는 많았어도 무기가 대단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연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수풀에 역사하시는데 압살롬의 군대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표현입니다.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명장 여호수아가 자신에게 투항한 기브온 족속을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 왕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맞서 싸울 때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시니까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그들에게 큰 우박을 퍼부으셨으므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우박으로 죽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찔려서 죽은 자보다 더 많았더라. 이 전쟁 역시 무슨 전쟁이었습니까? 우박을 주관하시는 자연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인데 누가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의 내린 10가지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구리 파리 이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전부 다 자연을 만드시고 자연을 주관하시는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결국 생명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처음 난 것들의 생명을 다 거두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음을 기억하시고 그 하나님이 바로 내 아버지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압살롬의 허망한 죽음의 모습을 보시면서 이 땅의 것 자랑할 것, 집착할 것이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압살롬은 이스라엘 최고의 미남이었습니다. 동생 다말도 미인이었는데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운 최고의 남자였습니다. 특히 압살롬의 자랑은 머리카락이었는데 길고 윤기 있는 압살롬의 머리카락을 매년 손질하면 저울로 4.5킬로그램 정도의 양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만큼 숯이 많고, 길고, 그리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 압살롬의 강점 머리카락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 머리카락 때문에 다윗의 군대 피해 도망가다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죽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 17절 다시 보십쇼. 죽어서도 큰 구멍에 던져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게 됩니다. 여러분 누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예 여리고성 무너뜨릴 때 도둑질한 사람 아간, 아름다운 시날산의 외투 금덩어리, 은, 이것 다 훔치다가 결국 걸려서 돌에 맞아 주고 돌무더기 무덤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런 돌무더기 무덤이 바로 여기 또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돌무더기 무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압살롬의 돌무덤은 결국 이곳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부모에게 잘못하는 자 영원히 저주 있으라 하면서 돌 던지는 곳이 되었답니다. 참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18절을 보십쇼. “압살롬은 살았을 때에 한 비석을 세웠는데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여러분 아들이 없어서 그냥 자기이름이라고 새겨 놓고 기념하자고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이 뭐라고 불려졌겠습니까? 아버지를 반역하고 잠깐 왕노릇하다가 후사 없이 죽은 패륜아의 비석으로 불리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에서 이렇게 허무한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잘 생긴 것도, 머리카락 좋은 것도 다 쓸모없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죽게 되었고, 쓸쓸히 그저 욕먹는 비석하나 세워놓고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보고 돌 던지고 두고 두고 욕하는 인생, 여러분 이게 얼마나 한심한 인생입니까? 외모에 너무 자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외모 때문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기념비 만들지 마시고 내 이름 어디에 새겨 넣지 마시고 내 이름 드러낼 생각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 기록된 것만으로 기뻐하시고, 살면서 오직 주님 이름만 드러내시면서 사시는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우리아를 죽게 했던 요압장군이 또한 아들 압살롬을 죽였다는 아이러니한 비극을 보면서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19절에 보니까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빨리 다윗왕에게 가서 전하려고 할 때에 요압 장군은 아히마아스를 말리게 됩니다. 그리고 21절에 구스 사람에게 전하라고 명하는데 20절에 요압이 아히마아스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쇼.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 죽이지 말라 했던 명령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을 죽여야만 끝나는 전쟁이었기에 그 명을 어기고 결국 상수리나무에 달린 압살롬을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찔러 죽인 요압이었습니다. 왕이 가슴아파할 것을 알면서도 압살롬을 죽인 요압, 이 일은 요압이 왕의 명을 어겼다는 것보다 다윗이 지은 죄와 연결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밧세바의 남편, 죽어야 할 이유도 모르고 다윗이 지은 죄를 덮기 위해 집에 오라고 지시 받았지만 동료들은 전쟁터에 있는데 내 어찌 혼자 편히 집에서 쉬겠습니까? 했고 집에 들르지 않고 다시 전쟁터에 나아가 영문도 모르고 후퇴 명령을 모르고 혼자 앞에서 싸우다가 억울하게 죽은 우리아 여러분 성경에서 이 우리아보다 더 억울한 사람, 억울한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이 죽음을 잊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이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셨고 결국 그토록 아끼는 압살롬의 죽음으로 그 죗값을 치르게 하셨다는 사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시고 심은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압살롬의 죽음이 다윗에게는 말 못할 내적인 비극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약해 맏아들 암논을 제대로 control하지 못한 다윗은 기어코 암논이 딸 다말을 겁탈하는 사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2년 동안이나 벼르고 있었던 압살롬은 결국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가고 맙니다. 그런데 다윗은 압살롬을 너무 그리워합니다. 결국 3년 만에 압살롬을 다윗 가까이 오게 했는데 그런데도 어찌할 줄 몰랐던 다윗 결국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고 다윗은 또 도망자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지금 이제 그렇게 속썩이는 압살롬이 죽었는데 신하들이 압살롬 죽었다고 보고하기를 꺼려하는 눈치를 볼 정도 참 힘든 다윗과 압살롬의 비극, 여러분 왜 다윗은 이렇게 계속해서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제 멋대로인 압살롬을 계속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또 사랑하고 마음 아파했을까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 우리가 제 멋대로고 죄짓고 때로는 하나님을 속 썩이는 천하에 못된 패륜아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어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워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탕자이지만 언젠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것을 바라고 또 바라는 기다리시는 아버지, 저와 여러분도 못 돌아올 수도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기회를 주셔서 이렇게 아버지께 돌아와 품에 안기게 되었다는 사실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입니까? 아직도 이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아버지를 꼭 전해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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