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3.09.16 | 히브리서 9장 11-22절 | 구진모 목사
히브리서 9장 11-22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새벽 묵상
오늘은 구약시대의 제사제도 중 중요한 것 세가지를 오늘 본문에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성소)과, 둘째는 제물의 피와, 대제사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 성소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현장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나 무소부재하시지만 하나님은 “나를 만나고자 하는 자는 성전으로 나오라, 내가 거기서 너희를 만나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려면 구체적으로 성소로 나와야 하는 겁니다.
물론 부득이한 사정으로 나올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은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뵙기를 사모합니다”고 하면서 성소에 나오지 못한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두번째는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전에 나왔는데 정결치가 못하고 지은 죄가 많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용서 받을 겁니까? 이 때에 제물이 필요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네 죄를 위하여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리라” 하셨기에, 죄 지은 사람들이 동물을 가지고 와서 “내 대신 이 동물을 바치오니 이 생명 받으시고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하는 겁니다.
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댓가는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죄의 무서움을 가르치는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의 크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희생 시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신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에는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용서란 거저 되는 것이 아니고, 용서 뒤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제물을 통하여 가르치신 겁니다.
세번째는 제사장입니다. 제물을 드림에 있어서 제 멋대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고기를 드린다 해서 그저 지지고 볶아서 양념 쳐서 드릴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정확한 예법을 따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바르게 드려야만 온전한 제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 바른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화목케 하는 것이 제사장의 할 일입니다.
한 마디로 구약의 제사 제도란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다시 말해 죄인이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에 와서 올바른 방법으로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은 그 제물을 통해서 죄를 사해 주시는 겁니다.
제사제도를 이렇게 말로 하니까 간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피로 얼룩진 제사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한 가지 죄를 짓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바칩니다. 죄를 하나만 짓나요? 또 짓습니다. 그러면 짐승을 또 죽여야죠? 그리고 죄를 또 짓습니다. 그러면 또 죽여야합니다. 나만 죄를 짓나요? 이 사람 저 사람 다 짓습니다. 수 없는 짐승들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피가 철철 흐릅니다.
속죄일 하루에 황소를 몇 마리 죽였는가 기록을 살펴보면 18만 6천마리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18만 6천마리의 황소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완전히 피바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제사를 수천년간 드려 왔습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피가 강같이 흐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하고 장엄한 제사도 사실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자체가 사람의 손에 지어진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물도 황소의 피에 불과한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도 자기 죄에 의하여 자기를 먼저 속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이기에 제사장도 불완전합니다. 이렇듯 성전,제물,제사장 셋 다 불완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10절에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이 제사 제도는 개혁이 필요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그랬습니다. 첫째로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로 개혁하셨고, 두번째로 본문 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결국 불완전한 염소의 피, 황소의 피에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제물로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물의 개혁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개혁이 이뤄집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했습니다. 죄많은 제사장이 드리는 것이 아니고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제사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성소요, 완전한 제물이요, 완전한 제사장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희생의 사건이 눈으로 볼 때는 한 죄인의 처형 장면에 불과하지만, 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서 가장 거룩하신 어린 양이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피의 제사를 드리신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그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는 누구시며 왜 오셨고, 우리와의 관계가 뭐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 단지 위인입니까? 능력자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전히 드려진 완전한 제물이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제사장이며 성소이신 겁니다.
오늘도 우리는 죄를 많이 짓고 삽니다. 그러나 사죄의 제사 제도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죄를 용서받고 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 제사 사건은 우리의 죄를 위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이것이 피의 제사입니다. 간단합니다. 이제는 입으로 회개가 고백되어지는 순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영혼에 뿌려지는 겁니다. 이제는 이 고백이 없는 한 죄 사함은 없습니다.
어떤 드라마를 보니까 다리 불구가 된 청년이 뚝방에 나갔다가 미끄러져 그림 그리던 도구를 다 놓쳤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궁금해서 뚝방길로 나갔다가 아들이 넘어진 것을 보고 그를 일으켜 업어주려 합니다. 업히라고 하지만 아들이 업히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불구가 된 것도 죄송스러운데 연로하신 아버지 등에 무겁게 짐처럼 업히고 싶지 않아서 사양하다가 결국은 업히게 됩니다. 그리고 울며 말합니다. “아버지,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대답 합니다. “아니다. 나는 네가 살아있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 한참 걷다가 다시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무겁죠?”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무겁다고 자식 업어 주지 못할 아비가 어딨냐? 나는 널 업고 백 리도 갈 수 있고 천 리도 걸어갈 수 있다. 얘야. 다리 하나 못쓴다고 낙심하지 말아라. 착한 마음으로 살아라.” 아들을 데려다놓고 어두운 뚝방길로 다시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이 떨어뜨리고 간 화구를 줏어 들면서 아들이 불쌍해 통곡을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죄인을 위해서 통곡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희생의 제물로, 그것도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형벌로 자신을 내주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사랑을 믿고, 약속된 미래를 살아가라!”
이 말씀이 오늘 이 아침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