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속회별 주관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3.09.09 | 히브리서 6장 1-12절 | 구진모 목사




히브리서 6장 1-1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새벽 묵상


오늘 본문 7-8절을 보면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땅위에 비는 똑같이 내립니다. 그렇다고 그 결과가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밭은 유익한 채소를 냅니다. 그러나 어떤 밭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도 합니다. 같은 흡족한 비를 맞아도 살아 있는 나무는 성장하지만 죽은 나무는 썩게 됩니다.


같은 가나안 땅을 같이 정탐하고 돌아왔지만 부정적인 말로 백성을 설득하는 10명의 정탐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긍정적인 말을 하는 여호수아 갈렙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3년 동안 똑같이 말씀을 배우고 기적의 현장을 체험했지만 가롯 유다와 같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을 위해 순교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성도들 가운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비를 흡수 했는데 결과가 다르듯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첫째로 은혜 받고 성숙해지는 성도가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나 다 어린아이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성장하지 않을 때 비극이 됩니다. 그 부모는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안고 한없이 귀여워하지만, 그 부모의 간절한 기대는 그 아이가 어서 커서 어른으로 성숙한 삶을 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성도는 날마다 은혜를 받아 어린 아이의 일, 곧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겁니다. 미성숙에서 성숙하라는 겁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신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에스겔 성전에서 나온 물이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고, 그 다음에는 무릎을 적시고, 그 다음에는 허리를 적시고, 그 다음에는 헤엄칠 정도의 많은 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장하는 순서입니다.


첫 단계는 발목 성도입니다. 왔다 갔다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성도를 말합니다. 둘째 단계는 무릎 성도입니다. 기도할 줄 압니다. 처음에는 5분만 기도하여도 무엇을 기도할지 모르다가 차차 기도가 깊어집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뜨거움이 있습니다. 셋째 단계는 허리 성도입니다. 허리는 봉사의 의미입니다. 자진하여 주를 위해 해야할 일을 찾아 허리를 움직여 봉사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온 몸이 물에 잠기는 성도입니다. 가정과 교회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가정이고, 집이 예배 처소가 됩니다.


이렇게 아침마다 주시는 이슬비 같은 은혜의 단비를 맞으면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즉 어린아이 같은 미성숙한 태도, 습관을 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말씀은 끝부분에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초를 닦았고, 초보의 도를 알았으니, 이제는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 받고 성숙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배반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흡족한 비를 맞고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배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한 명은 가시와 엉겅퀴가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200만 명의 이스라엘 민족 중에도 언제나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무시무시한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본문 4-5절을 보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 보고도” / 본문 8절에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은 죄를 또 지어도 또 용서하여 주시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와 성령 훼방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아무리 윤리와 도덕적으로 옳게 살아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간다고 한 겁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니 용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은 반대하였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과 함께 동조한 백성들까지 모두가 죽었습니다. 성령 훼방죄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 받은 이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기회가 있습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간음죄에 살인죄까지 졌습니다. 두가지 죄가 어마어마한 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철저히 회개 했습니다.


시편 6:6절에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고 회개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범죄는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범죄가 아니라 오히려 더 하나님과 가까워진 범죄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큰 범죄자였지만 철저하게 회개하는 다윗의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죄를 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도 실수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자도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해져야 합니다. 신자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신자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견고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다 담당하여 구속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잘 흡수하여 농사 짓는 농부가 원하는 합당한 채소를 내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같은 은혜의 단비를 받았는데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밭이 되면 버림을 당합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마지막에 불사름을 당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비는 내리고 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적당한 때에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비를 잘 받아서, 은혜를 배반하는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기뻐하시는 장성한 신자로 새롭게 거듭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entario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