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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별 주관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3.08.26 | 사도행전 27장 1-12절 | 구진모 목사




사도행전 27장 1-12절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새벽 묵상


사도행전 27장은 바울의 로마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장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3차에 걸쳐서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고, 그리고 이방인들도 이 복음을 사모하고 받아 들이는 것을 보고,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로마에서는 세계 어느 곳에나 갈 수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를 거점으로 선교를 하겠다는 것은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바울의 야심찬 비젼인 겁니다.


이런 야심찬 비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데, 예상했던 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박해가 심했습니다. 특별히 동족인 유대인들의 박해가 가장 심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붙잡혀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대에 넘겨져서 2년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인 것을 밝히고 가이사에게 호소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비록 이런 바울의 모습이 인간적인 모습이지만, 그러나 이제는 대 사도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 아니라, 쇠사슬에 묶여서라도 로마로 가야겠다는 간절한 소망과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비로소 27장에 들어와서 바울은 로마로 출발하게 됩니다. 비록 바울이 원했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언제나 인간의 방해와 핍박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방해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획된 역사를 취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인간의 죄와 실수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뤄가신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오늘 27장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그랬습니다.


바울이 원래 원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이제 여러 다른 죄수들과 죄수의 신분으로 배로 로마까지 호송되어 갑니다. 여기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께 간다고 했습니다. 이 죄수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각지방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들인데, 사형언도를 받은 죄인들을 로마에서는 많이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과 싸우게 하고, 검투사들의 희생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흉악한 범죄자들과 함께 묶여서 배를 타게 된겁니다.


그 당시 바울 자신도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었습니다. 가이사에게 간다고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므로 배 안의 범죄자들과 똑같이 불안한 마음으로 로마로 출발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비록 파송하는 교회도 없고, 전송해주는 교인들도 없고, 지참한 선교비도 없고, 몸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로마선교는 이제부터 쇠사슬에 묶인 바울과 함께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도 바울을 로마로 보내실 수 있었을텐데, 왜 바울을 이렇게 죄수의 신분으로 몸이 묶여서 로마로 가게 하셨을까 하는 겁니다. 거기에도 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이유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보여준 바울에 대한 증오심을 보면, 언제 바울을 죽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죄수들과 함께 가는 로마행이지만, 로마 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로마에 가서도 그 큰 도시에서, 그리고 낯선 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아마 바울의 계획대로 로마를 복음화 한다는 것은 오랜 세월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에 가서 어디에서 머물렀습니까? 죄수의 몸인데 로마의 대왕 가아사의 친위대, 즉 궁전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친위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왕의 가장 측근입니다. 그리고 왕의 일가친척들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머물면서 먼저 왕족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배려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신지 놀랍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 중간에 보니까 “...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고 했습니다. 1절에도 보면 처음에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하매…” 여기서 “우리”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과 적어도 두명이 바울이 탄 배에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함께 했을 것이고, 또 아리스다고도 함께 했을 겁니다.

왜 이 두 사람이 따라가는가 하면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바울과 함께 생명을 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누가나 아리스다고의 사명은 바울을 돕는 사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은사가 다 똑 같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똑 같은 일을 하도록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이 있고, 나가지는 못하지만 선교사를 위해서 도울 수 있는 여러 분야가 있습니다. 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릴 때 지켜 보던 우주 센터안의 수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한 대의 로켓을 쏘아 성공시키기 위해서 다 각자 다른 자기분야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갈 때, 그 시대의 배들은 지금처럼 크고 최 첨단 장비를 갖춘 배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너무 세게 불면 항해를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는 9월부터는 강한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11월이 되면 항해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의 탄 배가 항해하는 때가 9월 경입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 보면 바울이 “여러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 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의견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무어라 했느냐? 12절에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더라”고 했습니다.


결국 본문 11절에 보면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뵈닉스로 가도록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지금 항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곳 답답한 곳에서 무의미하게 겨울을 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미항까지 풍랑 속에서도 왔는데, 잘만하면 뵈닉스까지도 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겁니다. 결국은 뵈닉스로 가자 해서 파도를 헤치고 뵈닉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향락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이 후에 일어난 일을 다 알지만, 그래서 결국 그들은 큰 풍랑을 만났고, 물건도 다 잃고, 죽을 뻔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상식의 문제를 잘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기가 걸리면 감기 약을 먹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건데 며칠씩 감기 약도 안 먹고 금식하면서 나으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너 감기 약 먹지마”라고 하셨다면 모르지만, 그런 것이 없으면 감기약 먹으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줄 담배를 피우면서 “건강하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담배 피우는 자체가 건강을 해롭게 하는 것인데, 담배 피우면서 “하나님 건강주세요” 말이 안되는 기도입니다. 건강하려면 담배를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상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참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뻔히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 왜 향락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남들이 볼 때는 어때요? 누가 더 믿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저 풍랑이 부는데도 “믿습니다”라고 뵈닉스로 가는게 믿음입니까? 이럴 때는 상식적인 판단을 따라야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상식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갑니다. 원하던 모습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었습니다. 실패자로 가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섭리가 그 위에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항해하다가 우리가 원치 않는 풍랑을 만날 수도 있고, 쇠사슬에 묶여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든지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또한 지혜롭게, 우리 인생의 배를 잘 저어서 마지막 때에 최후 승리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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