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3.08.12 | 사도행전 21장 1-14절 | 구진모 목사
사도행전 21장 1-14절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새벽 묵상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를 합니다. 마라톤은 41.195km를 뛰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하는 경주입니다. 이런 마라톤 경주자의 마음에는 뭐만 생각합니까? 달려갈 코스와 골인 지점과 우승의 감격뿐입니다. 그것만 생각을 합니다.
바울의 마음에도 그렇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전하는 사명만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1절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0:24절에서 보았듯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그 곳이 로마이든, 예루살렘이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에 그의 생명을 내놓은 겁니다. 이처럼 바울의 주님을 위한 각오는 명확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바울보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 곳에서 이레를 머물때에도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합니다.
가이사랴에서는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며칠 머물고 있는데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는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여러 동역자들이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지금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 모두가 바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충분하게 기도하고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바울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열이면 열이 모두 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올라가야 합니까? 올라가지 말아야 합니까?
그런데 바울은 올라갑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바울은 고집불통 같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사람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말리면 포기 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같습니다. 지금 상황이 유대인들의 바울을 향한 마음이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을 때는 돌아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잠깐 상황이 바뀔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언합니다.
본문 13절에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그 결단이 대답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들 말대로 잠시 다른 곳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20:23절에서도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은 주님 가신 길을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올라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라는 겁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부합니다. 출애굽기 3:11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12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에 나병이 생겼다가 고쳐지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모세는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출애굽기 4:13절에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자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믿음의 거장 모세에게도 순종하여 애굽으로 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시고 니느웨로 올라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하려 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일, 올라가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요나도, 모두 처음에 거부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올라가셨습니다.
마가복음 8:27절에 보면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제자들이 28절에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29절에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30절에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32절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즉, 주님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올라가셨습니다.
지금 바울도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3:12절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고백처럼 바울의 소원은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달려가고 있는 길을 어떤 길입니까?
최경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 온 1.5세 목사입니다. 적응하기가 힘이 들어 몇 번이나 가출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공부를 그만두고 야채가게에 취직을 하여 돈을 벌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심도 오래 가지 못하여 술, 담배, 마약에 손을 대다가 번 돈까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결국 마피아에게서 마약을 훔쳐오는 일에까지 손을 대다가 수 차례 감옥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한 감옥에 있을 때 그 청년에게 한 목사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2천년 전에 당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물론 그 청년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이기는커녕 목사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계속 그 청년을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감옥을 버팔로로 옮겼을 때, 그곳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2년, 매 주 1회씩 10시간을 운전하여 달려오신 그 목사님의 사랑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그 청년은 외칩니다.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2천년 전에 당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고 말해 주었고, 그 청년은 회심을 하고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끊임없이 찾아가신 그 목사님의 2년이란 기간을 주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간 그 십자가의 길이, 그 청년을 지옥에서 천국일꾼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십니까? 원수를 용서하는길은 어렵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가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환대와 감사는커녕 비난과 핍박이 있는 길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을 생각하시며 오늘도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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