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3.03.04 | 사무엘상 19장 1-7절 | 구진모 목사
사무엘상 19장 1-7절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
새벽 묵상
오늘은 사무엘상 19장 1-7절 말씀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는 제목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요즘 “더 글로리”라고 하는 제목의 한국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송혜교씨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이구요. 이제 후속편이 3월 10일에 나온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저는 이 더 글로리 줄거리를 보면서 참 자랑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왜 자랑스러웠는가? 그렇게 작고 수도 없이 침략을 받았던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의 문화 콘텐츠가 이렇게 세계시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그럼 왜 안타까운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로 학교폭력으로 고통을 겪는 한국학생들의 현실이 참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이 더 글로리는 중고등학교 때 학교폭력으로 고통당한 여학생이 성장해서 자신을 수도 없이 때리고 고대기로 지지며 괴롭힌 친구라고도 할 수 없는 친구들을 하나 하나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중고등학생 때 이유 없이 학교폭력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키가 작아서 번호가 8번이었는데 담배갑을 열어 끝에 자리수가 8번이 나왔다고 이유없이 8번이기 때문에 맞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던지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학교 선생님에게도 적절한 이유없이 부당하게 말하기 힘든 폭력을 당했는데요. 더 글로리에서도 부모가 힘이 없어 억울하게 선생님에게 맞는 장면은 정말 보는 사람들의 마음의 큰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부당한 폭력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에 우리 교회도 그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부당한 폭력을 당해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이 여러 명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당연히 원수를 갚아도 되는 상황인데도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용서함으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은 형들에게 철저히 배신당합니다. 구덩이에 던져졌을 뿐만이 아니라 애굽에 가는 상인에게 노예로 팔리게 되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고 흉년으로 형들이 애굽에 오게 되었을 때 형들을 대면하면서 요셉에게는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가 오게 되죠? 어떻게 합니까? 형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을 흉년에서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형님들보다 먼저 애굽에 보내셨다고 표현합니다. 결국 아버지 야곱과 눈물의 상봉을 하게 되죠. 이게 원수 갚는 마음을 이겨내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복수할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겸손히 내 마음대로 원수 갚지 않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다윗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수 년 동안 자신을 죽이려고 추격해 오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선택을 합니까? 사울왕 곁으로 다가가 겉옷자락만 베어 나오고 또 한 번은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와서 사울왕을 참 부끄럽게 합니다. 내가 어떻게 여호와의 기름부은 받은 왕을 죽일 수 있습니까? 이제 나를 죽이려고 추격하지 마십시오. 하고 소리칩니다.
문제는 이렇게 원수 갚고자 하는 마음, 복수의 마음을 억누르고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참 대조적으로 잠깐 정신을 차렸다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한심한 사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control하지 못하는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왕은 처음에만 딱 한번 행구사이에 숨을 정도로 겸손한 모습을 보였지 그 이후로는 아주 미운 짓만 골라하는 파렴치한 인간의 모습을 계속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본성 속에 악한 본성과 선한 본성이 존재하는데 사울왕은 철저히 악한 본성을 따라간 사람, 점점 더 포악한 악한 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신기한 것은 그 애비에 그 아들인 경우가 참 많은데 이렇게 악한 길을 걸어간 사울왕에게서 선한 길을 선택하고 걸어간 아들 요나단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술 먹고 엄마 때리는 모습을 보며 자란 아들이 가정을 이루어 난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결심했으나 언젠가 보니 자기도 똑같이 아버지처럼 아내를 힘들게 하는 모습을 보여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많지 않으십니까? 바라기는 내 가정에 어릴 때부터 잘못 보아왔던 폭력과 악한 모습들은 다 벗어버리시고 가계에 흐르는 악한 것들은 다 끊어버리시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끊임없이 망가져 가는 악한 길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사울왕의 모습과 그 아들 요나단의 모습이 너무나 리얼하게 비교되고 있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왕의 모습을 보면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시는 모습을 떠올리시고 요나단을 보시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얻을 교훈을 찾는다면 우선 첫 번째로 악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대로 두면 계속 더 큰 악을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방치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수술하지 않으면 여기 저기 온몸에 퍼지는 암덩어리 같이 악은 초반에 다스리지 않으면 손쓰지 못할 정도로 커져서 감당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1절 보십쇼.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여러분 이 구절은 앞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서 사울왕은 은밀하게 다윗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 말에 꽂혀서 질투심이 더 커져서 그러면 이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 아니냐? 오해하고 확대 상상하여 결국 두 번이나 살해하려고 조용히 움직입니다. 18장 10-16절을 보시면 손으로 수금을 타는 다윗을 보고 창을 던져서 다윗을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그런 살인적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8장 17-30절에 보면 큰 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려고 하다가 다른 데로 빼돌리어 화나게 만들고 둘째 딸 미갈을 주는 조건으로 혼자서 블레셋 군인 100명을 물리치면 딸을 주겠다고 하면서 다윗을 손 안대고 코푼다는 말이 있죠? 즉 블레셋 군대에게 당해서 죽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블레셋 군인 200명을 물리치고 당당히 미갈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사울이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요? 이제 사울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제는 노골적으로 공개적으로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 바로 1절입니다.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너무나 이성을 잃어버린 추악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이 잘못된 명령을 따랐을까요? 성경은 그 신하들이 이 명령에 어떻게 했는지 답은 없고 1절 뒤에 단지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했다 하고 답하고 있습니다. 그냥 요나단이 아니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아버지와 너무나 달랐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심히 좋아하므로에서 심히는 헬라어 “머어드”로 너무나 크게 기뻐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아들이 이렇게 너무나 사울을 좋아했는데 일반 신하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사울 혼자 여론을 파악하지 못한 채 박수쳐 주고 격려해 주지 못하고 스스로 악한 길을 따라갔다는 것 여러분 기억하시면서 악한 길을 따르는 이는 결국 외로움과 패망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수가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수도 가끔 악한 길을 다같이 걸어가기도 합니다. 제일 심각한 것은 내가 내 삶의 중심이 되면 다수가 이야기해 주고 조언해 주어도 듣지 않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패배자의 길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사람들에게 귀를 열고 있으시되 가장 먼저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영적인 귀를 여시고 악한 길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악한 길을 따르는 사울과는 너무 다르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선한 길을 선택합니다.
우선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4절 보십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여기서 범죄하지 마옵소서는 헬라어로 엘라 알 예헤타 라고 발음하는데 엘라는 그에게, 알은 하지 마라, 예헤타는 죄를 범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헤타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생명을 해하는 것이고 생명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큰 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단은 지금 그냥 왜 제 친구를 죽이려고 합니까 하는 인간적인 표현을 하는 게 아니라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범죄입니다. 하고 진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죽게 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실 정도로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시는 것은 생명 멸하는 것이고,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생명 살리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것은 어려운 사람 돕고 양심대로 일하고 다 좋은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가장 선한 일은 생명 살리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단순히 착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생명 살리라. 영혼 구원하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기억하시고 요나단처럼 생명 살리는 선한 그리스도인,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요나단이 참 특별한 것은 혈연을 뛰어넘고 철저히 자기 자신을 버린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주심”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항상 구했던 사람, 하나님께서 요나단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셨고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하게 하셨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인간의 의지, 욕구 다 뛰어넘으시고 철저히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그 놀랍고 감사한 희생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감사하시고 선으로 악을 기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