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회별 주관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2.11.05 | 창세기 43장 15-24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43장 15-24절


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17.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새벽 묵상


요셉의 형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돈을 가지고, 또 약속대로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다시 요셉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즉시 동생 베냐민을 알아보았지만 그 정을 억제하고 자신의 청지기에게 짐승을 잡아 점심을 준비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형들에게는 요셉에게 범죄한 후에 늘 그들의 심정 밑바닥에는 항상 불안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죄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대하여 진실해야 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서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굉장히 좋아하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다윗이라는 말이 팔백번이 나옵니다. 사람의 이름으로서는 최고로 많이 나오는 이름이 다윗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한 번은 다윗에게 나단 선지가 와서 말합니다 “당신이 죄인입니다”고 할 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남의 마누라를 뺏어왔고, 남편까지 죽였습니다”고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내가 죄를 지었다”고 했지, 단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거나 환경을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죄를 짓고나면 창피해서라고 왕위에서 내려올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죄인보고 죄인이라고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그 부끄러운 얼굴로 그대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래서 자식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다윗은 그 자식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내가 지은 죄의 대가로 여기고 겸손하게 상황을 받아 드립니다. 이처럼 우리도 죄에 대해서 정직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누구 탓할 것 없습니다. “다 내 책임입니다. 나의 부덕함입니다. 나의 허물입니다” 할 때, 가정도, 교회도, 세상도 바로 세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잠언 28:1에도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


니라'고 했고, 이사야 57:21에는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


습니다. 우리의 격언에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죄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난 번 곡식을 사 갈 때 그 값을 분명히 치렀는데, 어떻게 해서 다시 자루에 돈이 들어 있는지 자기들로서는 알 수가 없다고 열심히 요셉의 청지기에게 변명을 합니다. 



그 때에 요셉의 청지기가 뭐라고 합니까? 본문 23절에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고 말하면서 요셉의 형들을 안심시킵니다. 



요셉의 청지기는 분명히 애굽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하나님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요? 틀림없이 요셉으로부터 신앙의 감화를 받아서 이런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겁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곧 불신앙의 사람들 중에 섞여 살다가, 그 불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신앙을 버리고 불신앙에 동화되어 버리는 신자가 있고, 반대로 불신앙의 사람들 중에 섞여 살면서도, 그 불신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킬 뿐 아니라, 오히려 불신앙의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끼쳐서, 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자들입니까?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인이 세상에 가장 감동을 주는 신앙은 자기를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이번에 한국 이태원에서 일어났던 사건속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여의사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심정지된 사람들에게 CPR을 통해 생명을 구한 일들도 소개되고 있는 등,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평생을 노점상을 하면서 번 재산을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 놓은 사람의 이야기 등등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소개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자기 것을 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향유 옥합을 깨어 주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감동적인 행위에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비싼 향유를 팔면 300 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는데,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좋은데, 왜 허비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도 가난한 이웃들을 돕자는 좋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자기 것으로 돕자는 것이 아니고, 마리아가 바친 향유를 팔아서 돕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의 행위는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자기 것을 움켜쥐는 삶, 자기 것은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삶은, 절대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감동은 내가 투자하는 만큼만 맛볼 수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이기적인 삶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겸손과 섬김의 자세가 아니라 대접만 받으려 하는 분위기에서는 어떤 감동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영육간에 감동적인 일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하루하루 무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십시오. 



감동을 주는 삶이 우리를 풍성하게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동적인 신앙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어지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