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의 의미를 살리십시오

새벽예배 2022.05.25 | 고린도전서 11장 17-26절 | 이선기 목사



고린도전서 11장 17-26절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새벽 묵상


저는 어릴 때 담임목사님이 축도하시는 모습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하심이 오늘 예배드린 모든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이 모습이 참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렇게 부러워하다보니 어느새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릴 때 소망한대로 축도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또한 축도만큼이나 뿌듯하고 제 스스로 감동적인 목회자가 인도하는 성례전이 두 가지가 더 있는데 바로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특별히 성만찬,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를 기념하면서 성도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이름으로 분급할 때 저도 큰 감동이 되고 성도님들도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요...그런데 언젠가 이 말씀 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언젠가 성찬을 분급하다가 웃음 참느라 참 고생한 경험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일했던 교회, 너무 큰 대형교회여서 그런지 많은 목사님들과 장로님이 짝을 이루어 성찬을 분급했는데, 저랑 짝이 되신 장로님이 빵 분급이었고 제가 잔 분급이었습니다. 성찬을 받으러 나오면 빵을 뜯어서 잔에 찍어 먹는 그런 성찬이었는데 성도님들이 많다보니, 새벽이어서 배고파서 그러셨는지 자꾸만 빵을 많이 찢어서 드시는 성도님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잔은 충분한데 자꾸만 빵이 금방 금방 줄어드니까, 줄은 길게 서 있고...제 짝이신 장로님이 고민하시다가...주님의 몸입니다. 주님의 몸입니다 멘트를 하셔야 되는데 갑자기 빵이 모자를 것을 예상하고 이렇게 멘트를 바꾸셨습니다. 쪼금만 떼십시오. 쪼금만 떼십시오...그 말이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잔 엎을 뻔 했습니다. 그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에 주위에 있는 모든 분들이 웃음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던지 지금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잠깐 동안 성찬의 본질과 그 목적을 놓치게 만드는 슬프고도 웃기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성찬이 배고픈 성도님들이 빵을 많이 떼는 일이 되게 하거나 그걸 적게 떼라고 말하시는 장로님, 성찬의 의미가 이렇게 돼서야 되겠습니까? 그 의미와 본질을 정확하게 살리는 예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고린도전서 10장 14-22절에 보시면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습관적으로 이방신에게 제사하는데 가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 음식을 먹는 일에 대해 책망하기 위해 성만찬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성만찬은 축복의 잔이다. 성만찬은 하나님과의 교제다. 하나님과 귀신을 어찌 겸하여 섬길 수 있는가? 이제 더 이상 우상에게 가서 제물음식을 먹지 말라! 혹독하게 책망하는 바울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성만찬의 의미를 더 본격적으로 설명하고 밝히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성만찬의 의미를 바울이 다시 자세히 설명하고 강조하게 되었는가? 17절 끝에 “도리어 해로움이라” 고린도 교회 안에 칭찬받지 못할 아주 해로운 문제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8절 중간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여기서 “듣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쿠오”라는 단어인데 현재형의 시제를 띠고 있는 것을 보니 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이 소식을 바울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성찬 때문에 어떤 문제가 계속 일어났는데 이 분쟁의 소식을 바울이 계속 도저히 들을 수 없어 이제 정확하고 분명하게 성찬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하고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서 21절에 아주 중요한 구체적인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당시에는 성찬 예식이 단순히 지금처럼 목회자가 성찬을 분급하는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찬식 후 함께 공동으로 식사하는 형태의 애찬과 만찬의 전통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걸 Love feast라고 하죠. “사랑과 교제를 위한 식사 ”라는 뜻인데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서 공동으로 분배하는 음식 나눔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원래의 의도대로 되지 못하고 어떤 부유한 사람은 많은 음식을 준비하지만, 가난한 자는 음식물을 전혀 준비해 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또한 일찍 성찬에 참여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미리 자기의 음식물을 먹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생각해 보십쇼.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옛날 학교 다닐 때 도시락 점심시간 되기도 전에 1교시 끝나고 도시락 미리 까먹는 애들처럼,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찬식 하기도 전에 성찬식에 사용할 포도주를 미리 마심으로 술에 취하는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21절에 마지막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이런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이들, 용서받은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한 마음이 되고 함께 있는 믿음의 형제들과 하나 되는 그 본래의 의미는 다 잃어버리고 오히려 빈부간의 격차문제가 심해지고 큰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 바울은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도저히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교회에 어떤 일이든지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데 힘쓰시길 바랍니다. 가능하면 교회의 본질을 지켜 가난한 자와 부자가 하나 되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하나 되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모여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나시길 참 교회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럼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성찬의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가?

1. 첫째로 바울은 주님께서 축사하셨다고 표현합니다. 24절에 예수께서 “축사하시고 떼어” 이 축사라는 말이 바로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라는 말입니다. 성찬을 헬라어로 뭐라고 합니까? 유카리스트라고 하죠. 영어 표현 Eucharist 바로 여기 고린도전서 11장 24절에 축사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온 영어 표현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축복하시고라고 표현했는데, 이 축사라는 단어 속에 사실은 성찬의 핵심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십자가지심을 코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시기 전에 제일 먼저 하신 일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 고난의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도 감사하는 것,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찬을 할 때마다 또 다시 회복되고 또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감사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감사는 무엇을 많이 가지게 되어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상황처럼 고난의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도 하게 되는 감사, 눈 앞에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 뒤에 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는 감사입니다. 성숙한 감사입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감사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바로 기독교의 본질이 발견됩니다. 우리는 그냥 무엇인가를 많이 얻게 되어 감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엇무엇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감사는 더더욱 우리가 할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의 세 가지 If~...하시면의 감사라든지 because ~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원래 우리들이 해야 할 감사가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소원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원 들어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사실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우리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In spite of~ 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감사, 하나님의 큰 뜻,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영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가장 귀한 것을 받았기에 세상에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 때문에 너무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감사, 이게 진짜 감사입니다. 여러분 이런 감사가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이 미국 땅에 청교도들이 처음 와서 했던 감사도 그냥 너무 많이 수확해서 얻은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영국을 떠나 이 땅에 온 102명중 44명이 죽고 나서 너무나 큰 고난을 겪고 나서 그래도 눈물겹게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드린 감사 바로 추수감사절의 기원 감사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찬을 하실 때마다, 아니 모든 예배마다,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맞을 때마다, 아니 평생 동안 성찬의 본질 감사의 사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할 때에 고난을 겪고 있지만 감사가 터져 나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고난이 와도 심지어 죽는 일이 있어도 이미 구원받고 부활의 나라에 들어갈 특권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주님을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24절 보십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절에 포도주 주시면서도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여기 이 기념이란 단어 “아남네시스”라는 말의 해석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크게 갈라집니다. 카톨릭은 바로 이 아남네시스라는 단어를 transubstantiation 정말 사제가 기도할 때에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한다고 믿는 화체설을 믿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다르죠. symbolism, commemoration 상징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고난을 기념하는 상징 쯔빙글리의 상징설, 그리고 주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심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본질, 신앙의 중심은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과 임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과 임마누엘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고린도전서 2: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스펄전은 한 설교에서 심지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속죄가 나의 설교의 중심 주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설교를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속죄가 선포되지 않는다면 설교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유명한 부흥사셨던 이성봉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 ‘십자가의 도’에서 내 주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속의 십자가의 참된 사랑에 녹아져서 항상 감사 찬송으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자아 중심주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매장하고, 산 그리스도가 내 중심에 계시어 살든지 죽든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며, 아버지와 인류를 위하여 주님께서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날마다 그가 가신 자취를 따라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때까지 십자가를 사랑할 것이다.”

저도 설교의 중심을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에 맞추는데 애를 쓰려고 하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모든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에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26절 보십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기념하고 기억하고 중심을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에 두고자 했으면 이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념만 하고 나만 기억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정말 주께서 원하셨던 것.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 그게 바로 성찬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꼭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찬을 행하면서 언제까지 계속 기억만 하시고 기념만 하실 것입니까?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영혼 구원하는 구령의 열정을 가진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삶 속에서 한 사람에게라도 이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