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07.19 | 고린도후서 7장 2-7절 | 구진모 목사
고린도후서 7장 2-7절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새벽 묵상
세월이 참 빠릅니다. 어느덧 올 한 해도 반이 훌쩍 넘어갔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을 뒤돌아 볼 때 새해에 결심한 것처럼 잘 살아 왔습니까? 아니면 부끄럽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2절에 “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소식을 들을 때 마다 마음이 매우 불편하였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특히 악의가 가득찬 사람들에 의해 바울은 불의를 행한 사람이요, 다른 사람에게 해롭게 한 사람이요, 또 속이는 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스런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본문 6절에 보니까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랬습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도 보면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힘이 들 때에 사람을 통해서 위로해 주십니다. 바울이 고난당할 때 디도를 보내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힘이 들 때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괴롬이 절반으로 줄어 들 겁니다. 그리고 위로가 될 겁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의 위로자가 되십시오. 괴로울 때에 위로자를 많이 얻기 위해서는 평소에 덕을 쌓고,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위로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분들을 통해 위로 받은 것으로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2절에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며, 자신들의 일을 변론한 것은 너희들을 정죄하고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 한 공동체로서 “함께 죽고 함께 살기를 원해서’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더불어 살자는 겁니다. 자기만의 이익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죽든지 살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배부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함께 잘 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상대방을 욕하고 비난하고 죽이는 삶이 아니라, 상대방을 용납하고 위로하고 상대방과 함께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더 깊은 의미는 “불의와 죄에 대하여 함께 죽고 의와 진리에 대하여 함께 살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본문 4절에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비난하고 모함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향한 신뢰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전히 그들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어떻게 말썽 많고, 말 많고, 그를 욕하는 모함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바울의 마음에는 그들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전도로 세상 우상을 섬기는 데서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여전히 신뢰하고, 자랑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들의 비난과 모함이 바울을 괴롭게 하고, 섭섭하게 한 것이 사실이지만,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괴로움 가운데서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여전히 머물러 있음에, 위로를 얻고,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보면, 바울이 일생을 통하여 전도하고, 목회하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자녀들을 많이 만들고, 길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고 양육된 사람들이 현재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이 장차 더욱 온전하고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현재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과 고통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 살게 했을까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직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죄로 벌써 죽었어야 할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함께 죽고 함께 살도록 만드신 겁니다.
선다싱(Sundar Singh, 1889-1929)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 시크교도의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신비한 체험을 통하여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인도와 티베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특히 힌두교도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선다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신학교수가 그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는데 기독교가 힌두교와 비교해서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선다싱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학교수는 그의 간단한 대답에 만족할 수가 없어서 다시 질문합니다. “힌두교에는 없는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기독교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크리스천으로 개종시킨 것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학교 교수는 여전히 그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질문합니다. “내가 질문하고자 한 의도가 당신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 같군요. 내가 묻고 있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신봉하도록 만든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있느냐는 겁니다.”
선다싱은 세 번째 질문에도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사람들을 크리스천이 되게 하는 것은 기독교에 다른 종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고매하고 독특한 가르침이나 교리나 사상이나 철학이 있는 까닭이 아니란 겁니다.
그래서 요한 1서 5:12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또 바울은 로마서 8장 10절에서 “그리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옛사람이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하는 것은, 어떤 교리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 이상한 것 찾아 다니지 말고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고, 사랑하고,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을 살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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