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2.05.20 |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 구진모 목사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새벽 묵상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 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복음을 위하여 세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것이 이 복음을 위한 원리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 모든 판단의 근거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교회는 제도에 의해서, 관습에 의해서 움직이면 안됩니다. 그 것들이 교회의 기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증거의 원칙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첫째로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자유자 이면서도 스스로 종이 되어 섬겼습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특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스스로 종이 되어 형제들을 섬겼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보다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도 바울처럼 한 영혼이라도 구원 받도록 섬기고 사랑하는데 있어야 할 겁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중에서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며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일부 직분자나 성도들이 섬김을 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기 위하여 자기의 직분을 과시하려고 하기도 합니다.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섬기는 자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가진자는 오히려 남들보다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직분자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도 항상 남을 섬기는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 받아 머리숙여 섬기는 삶을 살 때 주님은 우리를 더욱 높여 주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실 겁니다. 



이렇게 서로 섬길 때 교회안에서 다툼은 사라지고, 평안 할 겁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모든 사람과 같이 됨으로 섬겼습니다.



본문 20-23절을 보십시오. 이런 말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되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22절)”고 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 앞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정도로 강한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약한 그리스도인에게도 각각 저들에게 맞는 태도를 취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을 파기하거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다만 다양한 사람들을 복음으로 얻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과 같이 되려고 했던 겁니다.



22절의 '약한자들' 은 누구입니까?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즉, 이제 예수를 막 믿기 시작한 초신자들을 말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 처럼,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은 믿음이 강하다고 해서 제사상에 올려졌던 음식을 먹는 일을 통해서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시험을 줄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8:9절에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로 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약한자나 ,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구원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도 약한 자처럼 되고 , 유대인처럼 되고, 이방인처럼 되어야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세번째로 바울은 복음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 훈련이 있었습니다. 



본문 24-27절을 요약해 보면 바울은 하늘나라의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철저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절제하며 육신적인 욕망을 누르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날마다 자기 훈련을 거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는 선수들을 보면 그 나라에서 대표로 선발되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릅니다.  합숙훈련이다, 전지훈련이다 피 땀 흘려가며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막상 경기에 나가 금 은 동 메달을 따는 것 보면, 그것은 간발의 차이에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달을 따지 못하는 사람도 사실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겨우 간발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간 발의 차이가 평생 명예를 가져다 주는 겁니다.  2등 한 사람은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조금만 더 최선을 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평생 갈 겁니다.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좀 달라야 합니다. 이왕 믿는 것, 금메달을 따도록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간발의 차이 때문에 '노 메달' 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이를 위하여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3:13-14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 내일 당장 죽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야단이냐구요.  그렇습니까?  잠언27: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한 시간 앞을 모릅니다.  때문에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당껏'은 안됩니다.  주님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했습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 하면, 우리 주님이 진노하실 겁니다. 



 오늘도 우리의 사명,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이 땅에서 뿐 만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서도 축복 받고 상급 받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