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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11.25 | 잠언 19장 1-17절 | 구진모 목사




잠언 19장 1-17절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새벽 묵상


오늘 본문을 보면 가난이란 단어가 여러번 나옵니다. 1절에도 “가난하여도” 4절에도 “가난한즉” 7절에도 가난한 자는” 17절에도 “가난한 자를” 그랬습니다. 소외된 계층을 말하는 겁니다.


본문 1절에 보면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가난하지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어리석고 입술이 고약한 사람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우리말에도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하라”는 말이 있는데, “입술이 패역하다”는 것은 입이 비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말도 비뚤어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가난할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믿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행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도 가난한 계층으로 성장하셨고, 사역하실 때에도 늘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과 가까이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5:1절에 보면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명절은 마음이 들뜨는 절기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명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에서 대 도시로 올라온다는 것 부터가, 물론 종교적 의식에 동참하는 일도 있지만, 일상을 떠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들 뜨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예수님은 그 들 뜬 무리들을 떠나서 가장 외롭고, 불쌍하고, 가난한 환자를 찾아 가셨습니다. 즉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을 찾으셨던 겁니다. 일부러 못 본척 하며 피해 가고 싶은 가난한 사람들을 주님은 스스로 찾아가 만나 주셨던 겁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본받으려는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추수감사절과 성탄절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누구를 먼저 찾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러면 과연 무엇이 예수님께서 명절에 잠시라도 육신의 휴식을 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하고 소외된 그 병자들을 찾게 하셨을까요?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예수님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이 가난하셨고, 소외된 계층에서 자라셨기 때문입니다. 즉 그 당시로서는 겨우 생계를 유지해 나갈 정도의 직업인 목공일을 하셨던 겁니다. 아버지 요셉은 만삭이 된 자기 아내 마리아에게 해산할 여관 방 하나를 구해 줄 수 없는 남편이였으며, 결국 아기 예수를 말구유에서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소외계층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탄생한지 8일째 되던 날, 율법에 따라 정결예식을 치를 때에도 번제에 쓸 일년된 어린 양을 살 돈이 없어서, 겨우 비둘기 한 쌍을 제물로 바칠 수 밖에 없었던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하셨습니다.(눅2:21-24) 그리고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하루의 사역이 끝난 후, 편히 머무르실 집 한채도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이런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


이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삶을 사셨던 주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그 유명한 첫 설교를 하실 때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향후 사역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의 사역은 영육간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시기를 즐겨 하셨으며, 심지어 명절에도 그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찾아가서, 만나시고, 교제하시며, 치료하셨던 겁니다. 이런 주님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예수님뿐 아닙니다. 오늘 이 새벽에 예배를 드리고 계신 여러분들도 가난한 시대에 가난을 이겨내고자 몸부림치며 살았던 세대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어르신을 보면 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 입니다. 그러면 “오냐, 밥은 먹었는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마 지금 그런 인사들을 하면 밥도 못먹는 홈리스들인가 착각을 할 겁니다.


심지어 나이도 “몇살 먹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힘든 일을 처리하고는 “애 먹었네”라고 말하고, 사람들의 성격을 표현할 때도 “싱거운 사람, 떫은 사람, 매운 사람”이라고 하고, 가족의 숫자를 물을 때도 “식구가 몇명인가?”라고 묻습니다. 속담에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 대부분도 과거에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명절에 조용히 베데스다 연못가를 찾아가셔서 가난하고 외로운 병든자들과 함께하셨다는 말씀에 감동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영적 동상에 걸렸음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 말씀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을 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즉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을 돕는 사역이요,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역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차면 그 선행을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복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잠언 14:31절을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즉,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거나,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을 박대하고 멸시하는 것과 같은 죄악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을 보면서 우리끼리만의 즐거움을 누리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기도와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먼저는 믿음의 식구들 중에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과 사랑의 기도와 물질을 나누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믿는자들이든, 불신자들이든 막론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눔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겁니다.


에스겔 16:49절에 우리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나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즉 소돔성이 멸망 당한 주된 죄악이 자신에게는 풍요롭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인색한 삶이 주된 원인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좋은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까? 이제라도 미래를 향한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복된 미래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웃 사랑에 담겨져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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