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10.26 | 에배소서 5장 1-14절 | 구진모 목사




에배소서 5장 1-14절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새벽 묵상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선생님들 나름대로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고, 학생은 학생대로 해야 될 마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에 들어와서 부모는 부모로서 해야 될 일이 있고, 자녀는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또한 사업가는 사업가 나름대로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각계 각층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성도이기에 성도로서 꼭 해야 될 마땅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사랑을 입는 일입니다.


우리 생각에 사랑을 베풀어야지 사랑을 입는 일이 어떻게 마땅한 일입니까? 하고 반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받아야지 미움을 받으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베풀기 전에 사랑을 받는 일이 먼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베풀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낳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아서 사랑이란 받아 본 일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알아서 사랑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먼저 사랑을 입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곳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좋은 땅에 극상 품 포도나무를 심고 산울로 두르고 망대를 짓고, 즙짜는 구유를 파고, 농부가 들어오게 되면 전혀 불편이 없도록 온갖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불쌍한 농부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아무 대가없이 들어가 마음껏 일하고 먹게 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지극한 사랑을 베풀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가을에 추수한 다음에 세만 바치면 되는 겁니다. 농부는 기꺼이 응낙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1년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워낙 수확이 많은지라 세를 바칠 것을 생각하니 아까워졌습니다. 바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종을 보내어 세를 바치라고 독촉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농부는 종을 때려 죽였습니다. 계속 종을 보냈으나 여전히 때리고 또 죽였습니다. 주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그 악한 농부를 진멸해 버리고 세를 제 때에 낼 농부에게 주었다” 하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씀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농부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극진히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도중에 마음이 변했습니다.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 약속을 지키라고 계속 말씀으로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오는 대로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외아들을 보냈더니 외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하시어 이 천년 동안 나라 없이 전세계를 유랑하면서 갖은 수모와 갖은 어려운 고초를 다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에는 그렇게 사랑을 입었었는데 나중에는 사랑 받을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미움 받을 짓, 망할 짓만 골라서 행하다가 마지막에는 진멸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입는 일을 하는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먼저 누구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사랑을 입어야 되느냐?고 할 때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아도,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면,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본받습니까? 더욱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한 절만 거슬러 올라가면 4장 마지막 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본받을까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고 했고, 그리고 5장에 와서 1절에 “그러므로”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러므로”라는 말은 윗 절과 연결을 시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용서하라”는 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과거는 없었던 것처럼 용서해 주십니다. 이렇게 과거는 전혀 묻지도 않고, 잊어버릴 정도로 깨끗이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처럼 남에게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히 할 바라는 겁니다.


2)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어떤 사랑을 입었습니까? 계속해서 2절을 보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라고 하는 일본 여자 작가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쓴 수필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작가의 남편은 나이가 그녀보다 몇 년 아래입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끔찍하게 그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가도 남편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작가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깊은 산골 아주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거닐고 있을 때에 곰이 갑자기 나타나서 잡아먹겠다고 하면 자기는 곰한테 달려들면서 날 잡아먹는 동안 당신은 빨리 도망가세요”라고 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오히려 남편 뒤에 숨었다가 곰이 남편을 잡아먹는 동안에 자기는 도망을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대부분이 이 작가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시고, 우리를 살려 내셨다는 겁니다. 그런 사랑을 입은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하고 베푸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하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믿으면서 책망하는 일과 책망 받는 일이 마땅한 일이라는 겁니다. (11-14절)


다윗이 잘 하다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 때 나단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했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그 앞에 꿇어 엎드리고 통회를 하고, 자복을 했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성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성군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했지만 잘못했을 때 책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보다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입니다.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왕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나단은 마땅히 해야 될 말이기에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바로 섰고, 나라가 바로 되지 않았습니까?그러므로 책망이라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겁니다.


13절을 보면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 마다 빛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잘못사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런 사람에게 깨우쳐 책망해 주라는 겁니다. 그러면 잘 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될 때 빛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책망은 한 영혼을 불쌍히 여겨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책망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어두움의 일을 책망할 때, 여러분들의 남편도, 가정도, 온 나라가 바로 서고 구원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Comments


bottom of page